안녕하세요 @jisang 입니다. 오늘은 좀 무겁고 민감한 주제를 다뤄볼까 합니다. 글을 시작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주제는 제목에서 언급했듯이 성폭력입니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의사 국가고시에 성폭력이?? 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과는 달리 의사는 성폭행 피해자를 만나게 됩니다. 필요한 증거를 채취하고 검사하는 과정에는 의학적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임상 경험이 많은 의사가 아닌 이제 갓 의사 면허를 딴 선생님들이 성폭행 피해자를 처음 보았을 때 당황할 수도 있고, 피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말을 건네는 것도 어려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고시의 주제 중 하나로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질병관리본부의 설명을 가져오면, 성폭력이란 강간이나 강제추행, 성희롱과 같이 성을 매개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인 폭력을 의미합니다. 이 글에서는 주로 신체적인 폭력(성폭행, 강간)에 의한 경우에 의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일이 없을 것이고,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본인이 성폭행을 당하거나 가까이 성폭행을 당한 분들이 있으시다면 병원을 방문했을 때 어떤 과정으로 치료를 받을지 예상해볼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가보려 합니다.
1.
어느 질병과 다름 없이 성폭행 피해자의 경우에도 자세한 병력을 듣는 것과 신체진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행해야할 것은 피해자의 동의서를 받는 일입니다.
피해자는 신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많이 지쳐있는 상태일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병원을 방문해서 이전에 받지 않던 민감한 검사들을 받고,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등의 과정에서 더욱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절차를 생략하고 의학적인 조치를 적절히 취하기 위해서 우선은 피해자의 동의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단계입니다. 또한 얻은 증거를 관계 당국(경찰)에 전달하고, 법적인 자료로 제출되는 것도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허락하는 동의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만약 신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피해자의 동의를 얻어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첫 번째 스텝을 마치고 나면 이제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입니다. 의무 기록을 잘 작성해서 남겨두어야 추후 증거자료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확인해봅니다. 성폭행 발생 시기, 장소는 물론이고, 가해자의 정보도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또한 구체적인 신체적 접촉이 어디까지 있었는지(구강이나 항문까지도 확인합니다.), 흉기를 들고 위협하진 않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손상된 부위는 없는지 확인합니다.
성폭행 이후에 피해자가 어떤 조치를 했는지도 중요합니다. 샤워나 대소변 여부, 그 당시 입었던 옷은 챙겨왔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증거의 일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인 경우 더 상세히 알아야 할 정보들이 많습니다. 기존 부인과 병력(월경주기, 마지막 월경 시작일 등), 피임 여부, 마지막 성관계 시기 등이 중요합니다. 혹시나 모든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임신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한 상황이라면 매우 신중하게 조치를 취해야하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는 신체 진찰을 해야합니다. 들은 내용을 토대로 하나씩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중요한 포인트를 위주로 살펴보는 것이죠.
위와 같이 성폭력 응급 키트가 마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체모를 빗질해서 수집하고, 강력하게 몸싸움이 있었던 경우 손톱 밑 내용물을 채취하면 가해자의 조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구강 내, 항문 근처를 살피고 면봉 등으로 검체를 채취하고, 우드등 검사(피부 질환을 볼 때 주로 사용하곤 합니다.)를 통해 정액 여부를 관찰합니다. 질액을 채취하여 성병을 일으키는 세균 및 바이러스 검사를 시행하고, 혈액검사, 소변검사를 통해 매독, 에이즈, 임신여부 등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4.
필요한 모든 병력 청취와 신체 진찰을 마치면 그 결과를 바탕으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중점을 둘 부분은 성병 예방과 임신 예방입니다.
흔히 성관계로 전파될 수 있는 질병은 임질, 클라미디아, 트리코모나스, B형간염, 매독,에이즈 등이 있습니다. 그중 임질, 클라미디아, 트리코모나스에 대해서는 병이 확인되기 이전에 예방적으로 항생제 투여를 합니다. B형간염은 항체 검사를 시행하여 항체가 없는 경우 백신 및 면역글로불린(항체) 주사를 맞고, 매독과 에이즈의 경우 피해 직후에 검사로 확인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수개월 후에 추적 검사를 하게 됩니다. 물론 질병이 의심되는 결과가 나타난 경우에는 그 결과에 따라 바로 항생제 또는 항바이러스제 치료를 진행합니다.
임신 예방을 위해서는 응급 피임약과 자궁내 장치를 고려해볼 수 있겠습니다. 응급 피임약은 체내 에스트로겐-프로게스테론 농도를 조절하여 임신을 막는 약이 대부분 입니다. 자궁내 장치는 직접적인 물리적 자극을 유도하여 임신을 막아주죠. 주의하실 점은 약과 장치는 각각 성관계 시기로부터 3일, 5일 이후에 치료할 경우 효과가 점점 감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건이 발생한 후 빨리 병원을 방문해야 효과 있는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5.
무엇보다 중요하게 피해자의 마음을 잘 케어하면서 이 과정을 진행해 나가야 합니다. 가족 등의 보호자가 같이 입회해서 진료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겠죠. 수치심, 죄책감, 불안, 우울, 자살 사고, 대인 관계 기피 등의 정서적 반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의사는 본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 정신건강의학과의 자문을 구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주의사항입니다. 제가 쓰는 글은 의료 상식을 전달하고, 실제로 이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서 병원을 방문했을 때 대략 ‘어떤 진단의 가능성이 있고, 어떤 검사를 받겠구나’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만 진단을 내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의학적 필요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병원을 방문하셔서 의사의 상담을 받으세요. 그리고 글의 내용은 대개 교과서를 기반으로 하며, 실제 임상적 상황과는 차이점이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의학은 계속 발전하는 학문이고 교과서 외에 경험에서 오는 노하우가 굉장히 중요한 학문입니다. 그래서 수련병원은 ‘도제’식 교육이 살아있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입니다만, 실제로 성폭행 피해자를 만났을 때 차분하게 환자를 안심시키고 필요한 조치를 하기 위해서라도 의사들은 이러한 상황을 복기하는 수 밖에 없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은, 물리적인 성폭행이 일어난 상황 이후라면 꼭 바로 병원에 방문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이상으로 성폭력 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추운 날씨에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