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 운동 유적지 탐방

hanwoo(67)
Published in
#kr
Words
604
Reading
3 min
Listen
Play
9y

이제 몇일 있으면 3월1일 이죠
호국 보훈의 달은 6월인대 나라가 너무 많은 시련을 격다보니
기념하는 날이 많은가 봅니다
3월1일 전국민의 봉기가 있던날 지방도로 조차도 만세로라고 이름을 붙이고
해마다 그날을 기리는 지역이 있습니다
화성시 수촌리,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옛날에는 국정 교과서에도 나오는 사건인대
어제 이곳을 다녀왔습니다.
스크린샷(200).png
스크린샷(201).png

수도권에서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으므로 서해안 고속도로 발안 IC부터
지도로 보겠습니다
20180226_102054.png

수촌리 집단 학살
3.31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4월 1일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발안장 주변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고
4월 2일 일본은 제1차 검거 작전을 시작해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하세베 대장으로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보내고 6일까지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을 습격 방화하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한다.
4월 3일 수촌리 구장이며 천도교 전교사 백낙렬, 수촌 제암리 교회 전도사 김교철,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이 주축이 되어 우정면, 장안면 주민
2천여명이 모여 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한다.
4월 5일 새벽 3시 반경에 일본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이를 수촌리학살사건(水村里虐殺事件)이라 부른다.
출처: http://oldconan.tistory.com/37786
20180226_093235.png
제암교회.png
20180226_093333(0).png
20180226_093438.png
20180226_093520.png
20180226_093934.png
20180226_094031.png
기념관.png

제암리 학살 사건

4월 9일부터 16일까지 일본 검거반은 제2차 검거 작전을 벌이는데
이때 제암리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4월 13일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한다.
다른 지역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되었지만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은 상태였고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중위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았던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향한다.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는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는 말로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제암리 주민 가운데 15세 이상 성인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는데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온 것으로 보아 사전에 지역 주짐들의 명단을 확보한 것으로 짐작해 본다.교회에 사람이 모이고 아리타 중위는 교회 밖으로 나와 사격 명령을 내리고 교회를포위하고 있던 일본군은 창문에서 사격을 개시하고 교회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지르는데 이때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일본군들이 다니며 방화를 했다.
교회에 불이 붙자 홍순진(추정)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안상용(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
발각되어 살해당하고 노경태(노불의 증언)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다.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태성의 아내(당시 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하고
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건으로 안종후를 비롯 남자 21명, 여자 2명이 학살당했고 일본군은 인근 고주리로 가 김성렬 등 6명도 학살한다.
출처: http://oldconan.tistory.com/37786

스코필드 박사는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소식을 듣고 사흘만인 4월 18일 현장을 찾아와
일제의 만행의 흔적을 몰래 사진으로 찍고 주민들로부터 당시 상황을 전해들었다.
그는 사진과 자신의 증언을 담은 '제암리 학살 보고서'를 캐나다 선교본부에 제출하고
장로회 기관지인 '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Presbyterian Witness)'에 기고해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했다.
1920년 일본의 압력으로 캐나다로 강제 출국된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진실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1959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그는 소외된 자들과 학생들을 위한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하다가
1970년 4월 12일 82세를 일기로 삶을 마쳤다.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4번째 민족대표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스코필드 박사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자신이 그토록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한 일제 만행의 장소인
제암리교회에 95년만에 다시 왔다.
그의 모습이 동상으로 제작돼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공원에 설치된 것이다.
동상에서 5m가량 떨어진 곳에는 스코필드 박사의 손녀인 리사 크로퍼드(Lisa Schofield Crawford)씨가 보내온 캐나다의 상징 단풍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할아버지 동상 제막식에 초청된 크로퍼드 씨는
"할아버지를 기억해주고 동상까지 건립해 준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스코필드 박사의 동상이 세워진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에는 해마다 1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다.
기념관이 건립된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누적방문객은 120만6천명에 달한다.

3월1일 운동 유적지 탐방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