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민주주의 - 그 거대한 적폐를 넘어 : (1) - 용두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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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니페스토 운동이라고 공약 점검하는 사회 운동이 있는데 학교에서 한 번 해보지 않을래?"

법과 정치 선생님이 내게 했던 제안이었다. 나는 당시 학생회장에게 굉장히 불만이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금방 받아들였다. 특히 불만을 품었던 공약은 'CCTV 설치'와 관련해서였다. 도대체 언제 시행될 것이며, 예산은 어찌 마련할 것인가. 그런 의문을 품었다. 실제로 무언가 되었더라면, 전혀 가질 불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혀 실현되지 않았고, 많은 학생들의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학생회장이라는 자리가 '입시를 위한' 직위로 변질되면서, 대내활동보다 대외활동에 치중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법과 정치 선생님이 내게 제안한 메니페스토 운동은 그 불만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기폭제였다. 그럼에도 막상 처음에는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권유에 하겠다고 말 했을 뿐이다.

그러나 막상 작업에 착수하자 마자, 단순히 공약 점검에서 학생회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내용이 확장되었다. 왜 공약을 그렇게 지키지 않는지 알아보다가 발생한 일이었다. 이렇게 적어야 할 일이 많아지고, 보고서가 길어지나 나는 뭔가 정의감에 가득찼다. 이렇게 쓰면 학교가 조금이라도 변할 줄 알았다. 그리하여 '이걸 생활기록부에 써주십시오.'라는 요청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의욕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동아리 활동을 제외하면, 아마 고교 생활 3년 동안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이었다. 설문조사지를 작성하고, 동분서주하면서 직접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긁어 모아서, 내가 원하는 학생회 체제에 대한 대안을 작성했다. 그리고 완성된 보고서를 학교에 제출했을 때의 그 뿌듯함이란!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을 바꾸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차후 선거에서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충격에 빠졌다. 나는 열심히 했고, 합리적인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반영은 하지 않더라도, 개선을 위해 노력은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혹시 바꾸기 힘들어서, 차차 시행해보려고 한 것은 아닐까. 내 보고서가 가져온 ‘아무 변화 없음’에 대해서 여러가지 고민을 했다. 가장 명쾌한 답변은 교무실에 들어가서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무슨 소리나 혹여 듣지 않을까 소심한 생각이 들어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졸업하고 나면 무언가 바뀔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통해 전해들은 말로는 바뀐게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나는 '합리적으로 의견을 제출하면 사람들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합법적인 절차'로 하면 더 시너지가 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서 나는 그 환상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참으로도 순진하고 사회를 너무나도 신뢰했었다. 그래도 우리 사회가 '민주적인 사회'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것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보고서를 쓰기 위한 내 노력이 모두 거품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은 냉혹했다. 당시 합법을 주장하며 아수나로 같은 단체를 비판했던 내가 오히려 우스운 꼴이 되었다. 아마 당시에 내가 술을 마실 수 있었더라면 잔뜩 취해가지고 주정을 부리면서 교무실로 쳐들어 갔을 것이다.

처음에는 학교에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의 세계에는 항상 그런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란다.'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왔으니까. 그렇게 나는 좋은 의견인데, 학교 사정상 안 된다고 자위질을 했다. 실제로도 그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한번의 실패에서 좌절만 했고, 진정 바꾸자는 의지가 없었다. 좋으면 검토하고, 치열하게 논의해서 바꿔보자, 그러면 된다. 그런데 학교는 그러지 않았다. 당시에 나는 직접 출마를 하는 등의 조금이라도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작은 개선이라도 이루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보고서의 실패로 모든 것을 사실상 포기했다.

이 작업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용두사미다. 불타는 정의감으로 시작해 방대한 양의 보고서가 나왔으나,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그리고 뭔가 더 해보려는 시도도 없이 좌절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보고서를 읽게될 여러분이나, 다시 작성하게 된 필자에게 이 보고서가 시사하는 점은 분명 있다. 학교가 '기본적인 민주체제도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 형식적인 민주주의 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한다는 건 수치다. 아마 이런 점을 인식하고 있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볼 것은 그러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우린 이 현실을 냉엄하게 바라봐야 한다. 적폐를 치우자고 시민들이 분연히 일어난 시대에, 주변에 있는 사소하지만 큰 이 적폐를 지우지 못한다면, 촛불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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