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면 모든 게 이루어질 줄 알았다.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은 방향성 없이 흘러가지 못하고 고여있기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따분한 수업들과 매여있지 않은 생활들은 그냥 그렇게 무얼 할 지 모른채 하루하루가 지났고, 떨어지는 학점과 함께 고민이 시작 되었다.
나는 뭘 하고 싶은걸까.
그래서 적어보기 시작했다.
견문을 넓힌다는 말은 과분하지만 다른 땅을 밟으며 세계여행도 가고싶었고, 학점에 얽매이긴 싫지만 언젠간 올 에이쁠을 맞아보고 싶었고, 교육의 불평등함을 겪었으니 교육봉사를 하고 싶었고, 헬스를 열심히 해 튼튼한 체력과 멋있는 몸을 만들고 싶었고, 물맑은 바다 근처에 지내며 서핑을 배우고 싶었고, 귀여운 애완동물도 키우고 싶었고, 하나씩 적어보니 뭐라도 지금 시작할 수 있는 목표가 생기더라.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그림을 배워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미대수업인 명화따라그리기 수업이 생겼다. 경영대생인 나에게 미대수업이라니 너무나도 모순적이며 내가 하지말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일반적일 것이다. 나는 경영 전공 학점을 채우기도 바쁘니까. 친구들이 복수전공을 준비하고, 고시 공부를 하며, 토익 토플 수업을 듣는 것을 보며 나도 그래야 하는 걸까.
그때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이 됐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 내가 지금 두근거리는 걸 하자. 그래서 그렇게 미술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내가 수업을 듣게 되었다.
스케치북과 연필을 사서 수업에 간 첫 날. 선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 선을 왜그리지? 교수님은 연필을 너무 세우지도 않고 너무 눕히지도 않은 각으로 그리라고 하셨다. 사각사각 소리가 퍼졌다.
이번엔 원을 그렸다. 앞에 배운 선들로 명암을 표현하는 구나. 선이 쌓이면서 면이 나타났다.
우리 수업의 절반은 미대를 준비하다 포기한 사람들 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평소에 그림그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혼자만 느리게 거북이처럼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집에서 원그리는 법을 많이 연습했다. 출발선이 다르니가 내가 좀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기에도 위에 그림보다 이게 더 낫지만 아직도 입체가 아닌 면도 아닌 섬세하지 못한 선들이 이리저리 튀어나왔다. 지우개 쓰는 법도 배웠다.
사과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사과라고 말을 안하면 못 알아 볼법한 이 그림은 내가 그린 사과다! 주위에서 진짜 사과같은 그림을 칭찬하시는 교수님을 보고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언제쯤 사과같이 그릴 수 있을까. 무거운 전공책과 스케치북에 연필, 사과까지 들고 다니며 시간이 날때마다 연습을 했다.
다음에 그릴 그림은 손. 손은 여러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어 명암이 세세하게 나타나 그리기 좋다고 하셨다.
그림을 따라 그리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 문제가 생겼다. 비슷해보이려면 정확한 비율로 그려야 하는데 처음 그려보는 나는 비율이 너무나도 달랐다. 교수님도 완전 멘붕이셨다.
그래서 교수님은 하는 수 없이 자로 눈금을 재어 비율을 나눠 그리도록 하셨다. 근육에 따라 흑백이 쉴새없이 변하는 손을 보며 자로 눈금선을 그리고 라인을 그리며 명암을 넣었다. 왜 자꾸 선이 두꺼워 지는 걸까.
이때는 손가락 하나하나 명암의 차이를 몰랐다.
날씨가 좋은 밖을 보며 나가 놀고 싶었나 보다.
여기저기 선을 덧대 내 첫 번째 작품이 완성 되었다. 지금봐도 진짜 부족하고, 형편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재밌었다. 내가 배우고 싶던 것이라서 그런 것 같다.
다음에 그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나오는 손 부분이었다.
먼저 그림을 프린트해 자로 비율를 재서 눈금선을 그렸다.
이 때는 내 그림이 너무 부끄러워 과정사진을 안 찍었다. 스케치북에도 따라 격자무늬를 그린 후, 바깥라인을 먼저 따라 그렸다. 선을 섬세하게 쓰고 싶어서 여러 방향을 고민을 하며 하나하나 선을 쌓았다. 빛을 받은 부분은 더 밝게, 그림자 진 부분은 더 어둡게. 간단한 방법이지만 왜 이렇게 어려운 지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씩 손의 형태를 띄는 그림을 보고 조금 기분이 좋았다. 예전보다 발전된 것을 나도 느꼈으니까! 그림은 정말 좋은 게 내가 얼마나 나아졌는지가 눈에 바로 보인다.
노란조명아래서 찍어서 이상하지만 완성된 두 번째 작품. 격자선을 지우개로 지우고 하이라이트를 더 준다. 이때 쯤은 새벽에 해가 뜰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새벽 4시 50분에 찍은 사진이다. 오른손에 비해 왼쪽손의 명암 표현이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아 무척 속상하다.
이제 색을 쓰는 방법을 배웠다. 다양한 색의 색연필을 보니까 너무 곱고 예뻐서 설렜다.
다음 그릴 작품은 르누아르의 우산들 이라는 작품이다. 여기서 오른쪽 위에 있는 우산들만 그리는 거다.
한번에 파랑색으로 칠하는게 아니라 연필로 먼저 선을 그린 후, 파랑색의 보색인 갈색계열의 색으로 먼저 그리라고 하셨다. 색을 더 깊고 입체적이게 표현하는 방법인 것 같다. 그 위에 블루계열의 색으로 채색을 하면 연두색도 나오고 오묘한 청보라색도 나오며 입체를 띄었다. 이때부터 그림이 더 좋아졌다. 다양한 빛에 따라 색이 나는 그림은 너무도 매력적이었고, 그것을 색연필을 사용해 이렇게 표현하는 건 더 매력적이었다!
이때는 공부하는 것보다 그림그리는 것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보라색 노란색 파란색 노란색의 가지각색 색연필을 이용해서 칠하고, 마지막으로 블랙과 화이트를 이용해 하이라이트도 줬다. 아직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부족한 실력이지만 나름대로 제일 마음에 드는 세 번째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그릴 그림은 모네의 수련. 수많은 수련 시리즈 중에 나는 이 그림을 선택했다. 마지막 그림은 배경까지 그림 전체를 모두 그려야 했다. 정말 난감했다.
이것도 과정이 없는게 너무 아쉽지만, 먼저 격자선을 그리고 라인을 그린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색연필은 하나의 색이 아니라 여러가지의 색으로 칠해야해서 밑에 그린 밑바탕이 다 지워진다. 그래서 정말 어렵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먼저 갈색과 노란색으로 스케치북 전체를 다 칠해준다. 완성작품에서 새어나오는 따뜻한 빛은 이렇게 밑바탕을 열심히 깔아서 새어나오는 색이다. 그 위에 연두색을 또 깔아 명암을 주고, 주황색도 깔아준다. 그 위에 서서히 파란색을 쌓고, 그 위에 보라색을 쌓는다. 말로 설명하면 정말 쉽지만 실제로 해보면 선의 방향과 굵기를 생각해 칠하는게 정말 쉽지 않았다.
그 위에 이제 꽃과 잎을 표현해야하는데 모네의 수련은 정확한 선이 아닌 뭉개진 선들로 표현되어 있다. 물에 젖은 듯한 느낌도 난다. 그래서 잎사귀를 정확하게 라인으로 그려내는게 아니라, 선을 하나하나 겹쳐가며 표현한다. 연두색 갈색 초록색으로 잎을 표현하고, 꽃을 그릴 자리는 지우개로 살살 지워서 밑의 바탕을 얇게 하고 주황색 빨강색 분홍색 으로 형태를 표현한다. 내가 어느 정도로 표현해야하는지 감이 안와서 정말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레파스로 포인트를 주었다. 그래서 완성한 마지막 모네의 수련.
이 그림을 제출했을때 나는 교실의 맨 앞에 나가서 칭찬을 받았고, 내 그림은 맨 앞에 걸렸다. 처음 선을 그릴 때에 비해 가장 발전된 모습이 많이 보였고, 이 그림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너무나 과찬이시지만 나는 너무너무 행복해서 그 날 하루종일 웃고 다녔던 것 같다.
오랜만에 정말 어렵지만 싫지 않고, 오히려 두근거리는 순간들이었다. 위에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설명했지만 그 과정 속에 나는 행복했던 것 같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진심을 다해 노력하고, 더 나아지기 위해 고민했었다. 작품이라고 하기도 뭐한 한 장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몇 일 밤을 새고, 손목이 아팠다. 정말 보여주기 부끄러운 작품들이지만 나의 과정들이 부끄럽지는 않다. 미대생들을 포함한 예술인들은 정말 너무 멋있고, 작품들이 무던한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을 배우며, 노력의 가치를 또 배웠다.
그림이 정말 좋은 건 가시적으로 성과가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했는지 어느 것을 더 해야하는지 보인다. 사람은 가끔 그렇게 방향성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이렇게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로 하나씩 다시 채워가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