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회사를 그만둘 때 꼭 써보고 싶었던 이미지가 있었다. 비록 모니터 바탕화면 이미지로 깔 용기도 기회도 없었지만 아쉬운대로 동료들과 톡하는 방에 올려두었다.
드디어 아침이 밝았다.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날이 드디어 왔다. 새벽 6시 눈이 떠졌다. 목욕재계를 하고 아무 약속도 없는데 공들여 화장을 했다. 여유 있게 지하철을 탔다. 회사에 먼저 들어가기 싫어 늘 앉아있던 지하철 2번 출구 근처 벤치에 앉았다. 오늘은 20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다. 반쯤은 음악을 듣고 있고 반쯤은 혼이 살짝 빠져 있었다. 진짜인가. 역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젯밤에는 그저 흥분되고 기뻤다. 드디어 그 지옥같은 단톡방에서 나갈 수 있는걸까, 이젠 메일 알람앱을 꺼두고 핸드폰을 내팽겨치고 살 수 있는건가. 이젠 그토록 안맞는 내 상식 밖의 인간들과 마주치지 않고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걸까. 극심한 하이텐션.
아침 나만 빼고 모두가 바빴다. 대표는 예고대로 오늘 오지 않았다. 어제도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녀도 안했지만 어차피 나도 안했다. 그래서 실망할 것도 없었다. 오늘 안 보니 속편했는데 역시 그 여자는 안 올 때 사람 신경을 긁는 능력이 있다. 작성해본 적도 없는 서류를 나한테 받으라고 해서 아주 열받았다. 그리고 그런 말은 나한테 직접 안 한다.
이 회사는 늘 일이 눈앞에 닥쳐서야 급하게 쳐내는 고질병이 있는데 가끔씩 날 환장하게 만들었던 건 아주 중요한 일임에도 일을 그냥 막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다음주 월요일 출장가는 사람의 비행기 예약을 평일 내내 못하게 만들어 일요일날 하게 만들고 왜 카드 결제를 일요일날 하냐고 갈구던 회사다. 곧 회사명을 바꿔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닌 건 자명했고 나는 정말이지 그 계획을 듣는 순간부터 그 일에 연류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운 좋게 간신히 내가 나가고 나서 일주일 후에 회사명이 변경될 예정이다. 내가 그 회사명 변경건을 위해 처리해야 했던 사소한 사항은 3주 전부터 이미 챙겨놓았지만 본인이 준비해야하는 중요한 서류 작업은 거의 하나도 하지 않았다. (깊은 뜻이 있겠지...) 그러다가 어제 부장을 시켜서 잔뜩 다른 사람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떠넘기고 본인은 오늘 출근을 하지 않았다. 아 물론 마감기한은 내일 오전시간까지다. 여긴 항상 이런 식이다.
그래서 아침에 난리도 아니었다. 부장 역시 일을 오래 들고 있고 싶지 않아서 아침에 오자마자 담당자를 지정해서 하나씩 떠넘겼다. ... 그외 코미디가 아닐까 싶은 다수의 상황이 있었다. 나만 빼고 다들 울상 죽상이었다. 역시 그만두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부터 들던 생각인데 일이 아주 힘들었던 건 아니다. 번아웃증후군도 아니고 힘들어서도 아니다. 다만 일은 더럽게 재미없었고 성취감이 조금도 없었다. 그것도 괜찮았다. 적당히 안 밀리고 돈을 주니깐. 다만 내가 싫었던 건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방시으로 일하기 싫었다. 인간적으로도 물론 싫었지만 일적으로는 더욱 믿을 수 없고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갈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책임을 져주는 사람이 없는 것도 한 몫했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다.'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인다고 하면 불안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가 일하기 싫어서 귀찮아서라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닐테지만 하아.. 정말 그보다도 일이 처리되는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내 자리의 후임과 3주간이나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별로 열심히 할 생각이 없었는데 지난 인턴에서 호되게 당했던 신입은 집도 멀고 열의가 넘쳤다. 너무나 열심히 해서 열심히 가르쳐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보다는 더 긍정적이고 성격도 무던하고 불만도 없고 아직 이들에게 미운 기억이 없으니 부디 잘 지내길. 처음에는 일주일만 지나면 내가 할 일이 없어져서 뻘줌할지 알았는데 고맙게도 딱 적당한 속도로 3주간 나의 말을 잘 경청해주었다. 어제까진 조금 불안한 모습도 있었는데 오늘 보니 앞으로 적응하면 잘할 것 같다. 아주 고맙고.. 그리고 참 이 회사는 어쩌다보니 좋은 사람들만 잘 뽑는단 말이지.
오늘따라 더욱 한가해서 시간이 점점 더 느리게 갔다. 다시 한 번 잊은 건 없는지 꼼꼼히 짐을 챙겼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내가 혼자 다짐했던 게 있는데 끝났다고 기억을 미화시키지 말자..였더랬지.
그런데 회사를 나가는 순간부터 역시 나란 인간은 그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아주 잘 익은 순두부마냥 조금만 톡톡쳐도 다 부숴져나갈 것 처럼. 이미 끔찍히도 싫고 분노했던 경험은 사라져갔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그런건 중요치 않다. 그냥 마지막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마구 피어나온다.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내일은 더 이상 이 장면을 겪지 않아야 하고 기억에 남아 실재하지 않을 마지막에 대한 감상이라고 하면 될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회사 역시 그저 나의 또 다른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미움은 이미 사라져갔다.
밝게 인사하고 회사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친하게 지냈던 과장님이 배웅을 해주셨다. 그리고 문 밖에서 너무나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건넨다. 너무 뜻밖이고 놀라서 마음에 있는 말이 입으로 터져나왔다.
-어억 미쳤나봐! 저한테 왜 그러세요 우리 다시 안 볼껀가요?
-퇴사 선물이에요.
그리고 지하철을 내려가면서 너무나 예쁜 손수건과 편지를 읽으며 거의 울 뻔했다.. 지금 다시 편지 읽으면 울것 같아서 읽지 않는다.. 과장님 우리 내일 만나서 집에 안들어가고 놀기로 했잖아요.. 이러면 반칙입니다.
이런 몽글몽글하고 복잡한 감정과 별개로 나란 인간 어떻게 된 건지 호기롭게 그만둔지 10분도 되지 않아 벌써부터 오는 내내 뭐해 먹고 살아야하나 걱정과 압박이 나를 짓눌렀다. 아직 그만둔지 하루도 안 되었잖아. 이럴거면 왜 그만둔거냐.
이상하다. 어제까진 분명 속 시원했는데
아직은 반반이다. 나란 인간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가끔은 나를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믿고 가끔은 정말로 조금도 믿을 수 없다. 어차피 퇴근한 다른 하루와 크게 다를 게 없는데 벌써부터 두려워하는 꼴이라니 그건 역시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어쩔수 없이 할 수 밖에 없던 엄마와의 통화의 영향이 크다. 스위치가 눌러진거지-
그래서 지금 기분은 엄청 심난하다는 거.. 내일을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새출발하는 기분을 내볼까한다. 오늘은 오늘의 자유를 즐겨보려 한다. 뇌를 마비시켜야지. 지금 이 상태로는 불안감만 느낄 것 같단 말이지.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후회하는 건 지겹고 재미없으니깐 그만해보려고 한다. 새로운 경험을 선물해보려고 한다. 괜찮아. 쫄지마. 원래 너 가진 거 없었어.
P.S. 이렇게 적나라한 저품질의 일기를 매일 생산할 예정입니다. 요새 스팀잇에 글이 없다죠.. 그래서 죄책감 없이 RC 소진해보려 합니다. ㅎㅎㅎㅎ
P.S.2 이제와 털어놓는 뒷담화. 이 회사에 다니면서 가장 이해안되고 짜증나고 그만두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차장(남자임)이 간헐적으로 여자화장실을 몰래 사용하는 거... 대체 왜? 처음엔 의심만 했죠.. 아니 쓰려면 티 안나게 곱게 쓰던지.. 엄청 더럽게 써서 티가 납니다... ...... 동물인 줄 알았어요. 아무리 인원이 소규모여도 그렇지.. 대체 왜 여자화장실을?.. ..그러다 어느날 대범하게도 대낮에 제가 사무실에 있는데도 여자 화장실을 실시간으로 썼습니다. 그 때 갈등이 있던 직후라서 아무 말도 하지 말자라고 다짐했는데 너무나 경악스러운 사실에 도저히 말을 안할 수가 없었어요........ 엄청 조심스럽게 ... '저.. 제가 오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혹시 여자화장실 쓰는 분 계시면 안쓰시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죠. 차라리 아무말도 안했으면 좋았을텐데 당당한 말투로. '어? 그거 내가 썼는데! 미안해.'.. 라고 하더군요. 제 귀를 이심했음... 그런데 그 후로도 .....저 몰래 쓰더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아. 역시 그만두길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