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은 겨울밤 나지막히 정주행하고 싶은 목소리 @bbooaae님께 선물받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턱 막혀버리는 만남이 있다. 내겐 부모님과의 만남이 그러했다.
언제부터 부모님과 나만 남아버릴까 숨죽여 경계하게 된 걸까. 부모님과 함께 두 번의 여행을 했다. 그때마다 끝이 좋지 않았다. 나는 절대 부모님과 여행을 떠나지 않으리라 결심하곤 했다. 여행 계획과 가이드, 체력적 피곤함은 논외로 치더라도 꼭 삼일 째 되는 날 엄마와 언성을 높여 한 번은 싸우게 되곤 말았다. 그나마 함께 했던 행복한 기억이 모두 퇴색해버렸다. 엄마랑은 대화할 수 없어. 아빠하고는 말할 주제가 없어. 나는 그렇게 부모님과의 대화를 만남을 멀리했다.
그러나 내가 엄마나 아빠와 통화할 때마다 주변 사람이 보이는 반응은 이질적이다.
-너, 내 생각보다 훨씬 부모님에게 다정하잖아?
-내가 그랬나?
지난 수요일 엄마는 갑자기 일요일 시간을 빼서 남자친구와 넷이 만나자고 했다. 생각만 해도 불편하다. 부모님을 뵌 지도 오래됐고 남자친구와 부모님의 만남도 시간이 너무 오래 흘렀으니 보긴 봐야겠는데. 나는 남자친구가 바쁜 일이 있어 거절해주기만을 바라며 말을 꺼냈다.
-어 나야 언제든지 좋지.
-잘 생각해봐. 바쁘지 않아? 바쁘다고 해주면 안 돼?
-내 생각엔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엄마는 이 추위에 인사동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내가 감기에 걸려 콜록콜록거리는데 외출을 하자니. 부모님과 여행하면서 부모님의 체력은 나보다 다섯 배 정도 좋으시단 걸 알게 되었다. 만나기 전까지도 고민에 스트레스에 시름시름 앓았다. 무엇보다도 평소 낯선 사람 앞에서 과묵한 내 남자친구가 끼면 가뜩이나 어색한 공기로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견딜 만 할지 불안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 예상과는 다른 재미있는 데이트가 펼쳐졌다.
#그날의 익선동 카페 티라미슈, 수제애플티, 라떼
오전 11시쯤 종로3가에서 만나서 저렴하고 양도 많고 맛도 좋은 굴 보쌈을 거나하게 먹었다.
부모님은 서울 지리가 싫다며 끌고 온 차를 오빠네 집에 세워두신 채 택시로 움직였다.
술을 못하는 나를 제외하고 소주 1병을 시켜 셋이 도란도란 낮술을 하셨다.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익선동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는데 마치 친구를 만난 듯 편안했다.처음으로 부모님과의 대화가 재미있었다. 이런 대화라면 매달 정기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마저 해버린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저녁까지 함께 먹은 후에야 그 날을 마무리했다. 곧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이상하다. 나는 부모님과의 대화가 어려웠는데 어떻게 된 거지.
막상 남자친구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남자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으면서 특별히 질문도 하지 않았고 마치 매일 만나는 사람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무엇보다도 결국 그 자리에서 가장 말을 많이 한 건 나와 엄마였다.
'케미스트리', 흔히 줄여 '케미'라는 게 있는 게 확실하다. 화학반응, 궁합보다는 역시 '케미스트리'란 말이 와 닿는다. 어색하던 우리 세 명에게 남자친구가 더해지니 더 없이 따뜻하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불편하고 빡빡하던 관계에 윤활제를 덧칠해서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졌다. 무언가 존재 자체만으로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게 확실하다.
게슈탈트의 법칙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부모님과 남자친구 나의 의외의 케미에 놀라웠던 만남이었다. 조금 더 부모님께 유하게 대하는 착한 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평생 풀지 못했던 난제를 우연한 손길에 어린 아이도 풀고 마는 아주 쉬운 난이도로 변모한 느낌이다.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흩날리는 싸라기눈도 포근하게 느껴질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