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시장, 판매자와 구매자와의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좋은 제품은 제 값을 받을 수 없게 되고 결국은 불량품만 남게 되는 불완전 판매가 빈번한 비효율적 시장을 이르는 말. 대표적인 예로 중고차 시장이 있다. 어릴 적 레몬 시장을 배웠을 때의 충격이란 그럴 거면 대체 중고차 시장은 왜 있는 거야. 나는 절대로 중고차를 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건 무조건 지는 싸움이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중고차 시장은 잘만 굴러간다. 물론 나와 달리 차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구매자도 있을 테고 성능검사표 같은 보완장치도 있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모든 정보는 구매자에게 투명해질 수 없다. 구매자는 여전히 판매자만큼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시장은 굴러간다. 사람들은 중고차가 필요하니깐
남의 일이지만 남의 일 같지 않을 때가 있다.
두 달 전쯤 갑작스럽게 모집 공고를 올렸다. 외근을 나가려고 인사하던 부장을 이사가 붙잡고 눈치를 주자 부장이 마지못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포스트잇에 대충 휘갈긴 공고를 내게 내밀고는 채용사이트에 올려달란 한마디만 남긴 채 가버렸다. 세상 태어나서 그렇게 빈약하고 성의 없는 공고는 처음 본다. 아무 정보도 없는 누가 봐도 불량품이 확실한 공고 상품을 채용시장에 게재했다.
이 곳 사정을 뻔히 아는 나는 그 공고가 엉터리임을 너무나도 잘 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회사인지 무슨 직무를 맡게 되는지는 다 생략이 되어있고 다만 그 공고에는 네덜란드 현지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네덜란드어가 필수이며 영어를 능통하게 하는 사람 우대라고 적혀있을 따름이다. 우리 회사에 다니는 모든 사람은 동의한다. 그건 역대급 지옥이 되리란 사실을. 내게 거금을 준다 해도 절대 가지 않을 자리. 아직 회사의 실체도 없는데 무슨 사람을 뽑는 거지. 게다가 부장과 이사는 사람을 뽑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래서 두 달 넘게 그 공고는 방치되는 중이고 제대로 이력서 확인 조차 하지 않는다. '그럴 거면 대체 공고를 왜 올린 거야?'
물론 이유야 잘 안다. 다른 나라에 있는 실질적인 이 회사의 대표(대장)가 네덜란드 지사 만드는 거 어떻게 돼가냐고 닦달을 하고 압박을 주기 때문에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공고라도 올려놨을 뿐이란 걸.
그 공고는 사람을 뽑을 마음도 없이 최소한의 성의도 보여주지 않은 채 올려진 불량품이다.
그런데 대반전은 지원자가 몰린다. 그것도 물밀듯이... 한 명을 뽑는다고 올린 그 공고에는 지원자가 이미 800명을 돌파한 지 오래다. 이 헛웃음 나는 현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대체 이런 엉터리 공고에 누가 지원하겠냐며 콧방귀를 뀌었었지만 인정한다. 내가 틀렸다. 그것도 완전히 말이다. 사람들은 이력서를 읽지 않자 메일을 보내고 답장이 없자 전화를 하고 심지어 찾아오겠다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세상에... 맙소사...
인사팀이랄 것도 없고 이 회사 모든 메일을 내가 확인하기 때문에 가끔씩 지원자의 이력서를 보게 된다. 오늘 우연히 한 지원자의 적극적이고 열의에 넘치는 이력서와 메일을 읽었다. 내가 가서 도시락이라도 싸들고 말리고 싶어 진다. '.. 이들은 영어 이력서의 영어도 읽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의 한글 이력서도 읽지 않을 거예요. 왜 당신 같은 능력자가 이런 자리에 오려고 그렇게 간절하게 애원 하나요. 지금이라도 도망가세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는 그 불량한 공고의 매력은 단 한 가지, '네덜란드 현지 근무'. 그만큼 한국을 떠나고 싶은 사람이 많은 건가. 이 직장에 감사한 게 하나 있다면 나의 외국병을 고쳐준 데 있다. 해외 근무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떨쳤다. 물론 모든 해외 근무가 이토록 최악 일리 없겠지만 있어 보이는 곳 괜찮아 보이는 곳도 일단 경계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까. (왜냐하면 한국에 있는 이 회사도 별로지만 콜롬비아에 있는 그 회사는 절대 못 다님. 보통 새로운 사람 뽑아도 한 달도 못 버티고 뛰쳐나가는데 이해가 됨) 해외근무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날려버린 셈이다.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좋은 사람들과 하며 성장하는 회사가 좋은 회사일뿐이지 꼭 한국에 있다고 별로이고 외국에 있다고 파라다이스는 아니라는 점. 그냥 회사를 봐야 한다. 회사 by 회사..
채용시장만큼 레몬 시장인 것도 없다. 중고차 시장보다 더한 비대칭 정보가 난무하는 곳. 사실 정말 괜찮은 회사의 괜찮은 자리가 나오는 게 더 이상하다. (시세 확장이라면 조금 다르려나..) 회사 입장에서는 뽑을 사람이 없다. 지원자도 포장하고 부풀리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그래 봤자 회사만큼 속이고 감추는 게 많을까. 회사야 자기 패를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원하는 자격을 요구할 수도 그 외 지원자에게 궁금한 걸 얼마든지 물어볼 수도 있다. 그렇게 까다롭게 굴면서 지원자들에게는 합격 여부도 제대로 알리지 않는 회사가 얼마나 많은가. 어떤 일을 하게 되고 어떤 보수를 받고 어떤 사람들과 어떤 분위기와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설명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회사가 얼마나 많은 가 말이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 지원자는 오늘도 열심히 그 레몬 시장을 뒤적인다. 불량품이 난무하고 설명서도 없는 질 수밖에 없는 그 싸움을 이어나간다. 레몬 시장에서도 운이 아주 좋으면 극소수의 괜찮은 회사를 만날 수 있으니깐. 조금이나마 나은 미래를 꿈꾸며 적어도 현재 여기보단 낫겠지 속는 척 또 갈아타 보는 거다. 새로운 곳을 끊임없이 탐색하며 희망의 끝을 놓을 수가 없다. 먹고사니즘은 고귀하고 일자리는 필수니깐.
실제로 다녀보기 전까진 절대 맛을 알 수 없는 비대칭 레몬 시장, 그게 채용 시장의 실체 아닐까. 그럴듯한 번드르르함에 속지 말지어다.
P.S. 사실 레몬은 좋아합니다. 레모네이드, 레몬티, 아이 러브 레몬 심지어 레몬트리 노래도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