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마음이 있는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계속 엇갈리는 클리셰를 견디지 못한다.
간 발의 차이 자꾸만 어긋나는 타이밍 속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 너무 답답하다.
서로에 대한 사소한 오해로 마음이 있음에도 헤어지고 마는 서툰 사랑을 그대로 두지 못한다.
나는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해버린다.
담이 있으면 담벼락 위로 올라가 고래고래 상대방에게 전해지도록 소리치는 타입이다.
헤어지기 전에도 불필요한 미련이 남지 않게 끝까지 해보고 나서야 돌아선다. 확신이 생길 때까지 대화하려 애쓴다. 물론 그렇다고 이별이 아름다워질리는 없다. 감정의 속도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이별에 합의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누군가는 꼭 상처를 받고야 만다. 그럼에도 이미 끝을 선고한 관계에 애매하게 굴어 괜한 기대를 안겨주고 싶지 않다. 반대로 가망 없는 사이를 홀로 붙잡고 '혹시나'하는 희망고문도 사절이다. 관계만큼은 우유부단하지 않는다. 명료하려고 노력해도 복잡 미묘한 검정이 얽혀 애매해지고 마는 게 이성과의 관계니깐.
이런 내게 그는 유일하게 체념을 가르쳐 준 사람이다. 세상엔 끝까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관계가 존재하며 진심을 다하고 애를 써도 절대 알 수 없어 그저 마음속에 묻어둬야 하는 질문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연애의 시작은 한 사람의 감정으로 충분하지 않다. 꼭 두 사람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별은 일방적이다. 한 사람의 변심이면 이별은 성립한다.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 얼마나 좋아했는지와 관계없이 어느 날 상대방이 끝내기로 한 그 순간 연애는 끝이 난다.
나는 그에게 일방적으로 차였다. 우리는 20살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났다. 분명 그가 먼저 나를 좋아했고 고백했지만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애매한 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거절을 어려워하는 그에게 기어코 '헤어지자.'라는 말을 육성으로 받아냈다.
난 그 사람을 내 연애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날 사랑한 적 없다. 무언가가 시작되기도 전에 끝이 난 싱거운 사이. 20살 때 겪을 만한 짧고 얕고 가벼운 호감. 단지 그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헤어진 이후 나는 그 사람을 더욱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그와 헤어지고 2주 후 대낮에 말끔한 정신으로 그의 집 앞에 찾아가 다시 한번 차분히 물었다. 정말로 헤어지길 원하는 거냐고 우리의 다음을 보고 싶지 않냐고.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내 마음과 상관없이 어차피 이 관계는 끝났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를 포기해야 했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직접 듣지 않았지만 헤어진 이유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그에게 지나치게 빨리 다가갔고 나의 모든 마음을 미숙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우울하고 부정적인 내 감정을 아직 공고하지 않은 관계에 마구잡이로 펼쳐 보였기 때문에 그는 지쳤다. 하나 재밌는 건 헤어져야 했던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 사람은 연인이 아닌 친구로서의 내가 필요했다.
나는 그를 포기했기에 계속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사랑하고 연애했다. 그에게 기대도 미련도 없었다. 나는 나의 삶을 살았고 그는 그의 삶을 살았다. 나는 평범한 대학생활을 마치고 취직을 하게 되고, 그는 하는 일마다 번번이 꼬였다. 간 발의 차이로 탈락하고 타이밍이 맞지 않게 자꾸만 생에서 미끄러져 어느새 고립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럴 때 나는 그에게 위로가 되었다. 20살 연인으로서 나는 그에게 짐이었지만, 바라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그의 말을 경청하는, 그리고 아픔을 이해하는 나는 꽤 괜찮은 친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공들여 설명하거나 꾸며낼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는 어느새 편안해지고 꽤나 담백하고 믿을만한 적당한 거리의 우정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7년간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이 오면 일상적으로 짧게 대화했다. 만나면 커피를 마시며 2시간 정도 대화했다. 같이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공원을 가거나 사진을 찍지 않았다. 연애 사랑에 관한 주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개인적인 생각과 일화, 읽은 책과 영화 음악 그리고 미래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 대화를 끝내고 그 자리에서 헤어지고 각자 갈 길을 갔다. 배웅도 없었고 잘 들어갔냐는 안부 문자도 없었다. 그렇게 또 각자 살다 잊을만할 때쯤 그의 연락이 왔다.
우리가 만날 선택권은 그에게만 있었고 그는 그 권리를 남발하지 않았다.
그가 너무 힘들 땐 내가 잠시 그에게 리베로가 되곤 했다. 너무나 지쳐 다 포기하고 싶어 지면 그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밝은 목소리와 모든 에너지를 꺼내 그에게 '잘하고 있어. 거의 다 왔어. 너는 할 수 있어. 네가 가려고 하는 그 길이 맞아!'라며 무조건 긍정해주었다. 그는 고맙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것도 딱 두 번뿐이었다.
그와 7년을 만나며 대부분의 날은 괜찮았다. 나도 내가 그를 잊은 줄 알았다. 계속 친구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6년째 어느 날 나는 여전히 아직도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어이없는 사실을 자각해버렸다. 생각해보니 그를 만나기 전 날 항상 아이처럼 설렜다. 바보같이 왜 몰랐을까? 그를 만나고 돌아오던 길에 늘 글감이 넘치던 내 머릿속을. 그는 오래도록 나의 글의 뮤즈였다. 억눌렀을 뿐 그에 대한 마음은 더 커져있었다.
그때 그는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가서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있었다.
처음엔 그가 잘생겨서 좋았다. 키도 크고 몸도 좋은데 중저음 목소리마저 멋졌다. 노래도 잘 부르고 똑똑했다.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남자. 그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사람이 갑자기 이유도 없이 내가 좋다고 해서 좋았다.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이며 미래의 꿈이 가득한 그가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약해지고 삶이 어려워질수록 그의 내밀하고 어두운 감정이 느껴질수록 그가 더욱 좋아졌다. 순수하고 맑고 예쁜 마음이 보여 걷잡을 수 없이 그가 좋아졌다. 그 사람 자체가 좋아져 버렸다. 그가 자꾸 실패하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지고 미래가 불안해져도 내게만은 20살 처음 본 날처럼 빛이 났다.
그는 7년간 단 한 번도 나를 이용한 적 없었다. 온전한 한 사람으로 대해주었다. 그를 만나면서 한 번도 감정이 상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힘들 때조차 내게 감정을 풀지 않았고 늘 나를 배려했다. 단 한 번도 나를 헷갈리게 하지 않았다. 내게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의 그 따뜻하고 냉철한 배려와 예의 덕분에 그의 의도와 반대로 나는 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와 친구로 지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었다. 하고 싶은 말을 늘 마음속에 묻고 너무 다가가거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거리를 조절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내 밑바닥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솔직해야 했다. 그에게 감사함만을 지니려고 노력해왔다. 소중히 공들여 지켜온 노력 해 만든 친구 관계가 망가질까 겁이 났다. 나만 조금 참으면 될 것 같았다. 그를 곁에 두고 싶었다. 그의 지인이 되고 싶었다. 그냥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마음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커져버려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여행을 가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한 끝에 깨달았다. 그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조금 더 상황이 나아지면 달라지지 않을까? 외부적 환경으로 나에 대한 마음을 숨기는 게 아닐까. 나의 헛된 기대와 욕심이었다. 그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다. 다른 이유는 중요치 않다. 그 여행을 한 끝에야 그를 진정으로 잊고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우리는 친구로도 지낼 수가 없다. 그가 아무것도 안 해도 나는 설렜다. 자꾸만 설렜다.
그는 이미 7년 전 내게 명확히 말했었다. 우리의 다음 같은 건 없다고. 상대가 싫다 하면 마음이 뜯겨나가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던 나인데 그에게만큼은 그렇게 오래도록 미련을 놓지 못했다. 잊은 척하며 친구 행세를 하며 그의 옆에서 떠나질 못했다. 작은 친절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참 질기고 깊이 좋아했었다. 인정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이미 지독한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
지난 5년간 처음으로 그를 잊고 지냈다. 그다지 그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를 만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어느 날 그의 번호를 지웠고 우리는 그 순간 타인이 되었다. 내 번호는 20살 이후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지만 그에게 연락이 온 적은 없었다. 그날의 고백이 마지막이었다. (그에겐 그후로 네 달동안 연락이 없었고 여행을 떠나고 나서야 여행을 떠났다는 카톡을 했고 여행이 끝난 후 돌아왔다는 카톡이 다였다.)
앞으로도 그를 만날 일이 없다. 그도 나를 만날 일이 없다. 끝까지 간 적 없었기에 우리는 서로의 민낯을 본 적도 거북한 밑바닥까지 엉켜 내려간 적도 없었다. 그와 나의 사이는 미완의 관계로 흐릿해진 기억 속에 내 맘대로 박제되었다. 반쪽도 못 되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내 인생 페이지 작은 귀퉁이 오래도록 남몰래 설레게 해 줘서 고맙다.
지하철을 탔는데 샴푸 향이 나더라. 나도 모르게 그 여자를 따라 내려 한참을 걸어가다 정신이 번쩍 들었어. 내가 미쳤구나 싶더라. 그날 하루 종일 그 샴푸 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후각의 기억이 생각보다 강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