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JOHN입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확실치 않지만 온라인상에서 ‘개취존중’(개인의 취향을 존중해달라는 뜻의 줄임말)은 이제 하나의 정론이 된 듯하다. 누군가의 딴지로부터 방어막을 치기 위해 ‘개취존중’을 해달라고 미리 못박거나 끝없이 이어지는 댓글들 사이의 논란을 일단락하기 위해 ‘취존’(취향존중)을 요구하기도 한다. 적어도 편향적 취향의 공동체화가 뚜렷해지는 온라인에서 취향은 마법처럼 모든 분란을 한순간에 종식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옮겨가면 ‘취존’의 마법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특히 음식에서 자기 취향을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정 음식을 좋아한다고 밝히는 선호도, 반대로 특정 음식을 싫어한다고 밝히는 반감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게 망설여진다. 세세한 이유야 각기 다르겠지만, 한 가지 공통된 이유는 내 취향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염려한다는 것이다. - 강보라, ‘개취’입니다, ‘존중’해주세요
우리는 관습적으로 남을 차별하는 것이 그릇임을 알면서도 왜 끊임없이 인식과 시선의 폭력, 즉 오리엔탈리즘의 발견을 목격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 어쩌면 중심 없는 공동체라는 것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글은 비이성의 시대 : Subaltern은 왜 말할 수 없는가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마다 갖는 인간적 권리가 차이가 있고, 사람들 간에 존재론적인 우열이 있다는 과격한 주장은 온당치 못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변에서는 여전히 문화나 민족, 종교, 지리적인 구분, 성, 언어 등의 기준으로 다른 인간존재들을 무시하며, 알게 모르게 그 차이의 기준이 우열의 기준인 것처럼 인식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아도르노가 말한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껏 문화적인 차별이 이루어지고, 인종적인 차별이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은 본능이라고 치부해버리곤 했다. 인간들은 언제나 익숙한 것엔 우호적으로 대하고, 낯선 집단들을 만날 때는 적대적으로 한다는 유전자적인 정보에 따른 본능 말이다.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나는 이런 믿음이 현상의 더 깊은 이해를 차단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고, 일단 이 생각을 거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성의 문제였다.
데카르트(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로부터 시작되고 우주론적 기계관과 계몽주의로 정점에 이르렀던 주관성의 철학은 자아의 발견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되는 대상의 분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철학은 출발부터 회의론과 불가지론을 내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주변 사물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따로 떨어져 인식될 수 없었던 삶의 구도로부터, 이제 독자적인 자의식을 가진 '내'가 내가 아닌 ‘다른 대상세계’를 나의 눈으로 바라보는 구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의식이 선명해지고 분명해 질수록, 우리는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내가 가진 이성으로 바라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광기로서만 존재하고, 단순히 비이성이라고 단정 지어버리게 된다. (내가 생각할 때)세계사 속 서양에서 처해졌던 마녀사냥이나,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들도 이런 것들에 기인한 것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때, 왕왕 '미쳤다'고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광기를 의미하는 단어들을 실제로 사용할 때, 미친 사람을 지칭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이성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붙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껏 치부되어왔던 광기라는 것들은, 그것들이 모두 하나의 인간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들이지만 내가 가진 이성으로는 포용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결론으로 말미암아, 중심 없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대안은 (1)소극적으로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불신을 깨닫는 데서 시작하여, (2)적극적으로는 이성에 종속된 광기의 탈피 혹은 그것을 넘어선 해방의 미학 등을 생각했다.
(1) 앞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지금, 우리의 이성과 자의식이 분명해질수록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기가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음을 언급했다. 이것은 어쩌면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한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이성으로 완전하게 그 사람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람이 인간적인 요소가 결핍된 미친 사람이라거나, 앞으로 전혀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존재라고 독단적으로 맹신하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내가 가진 이성 능력이 한계가 있고 잘못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줄 아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금 저지르고 있는 나의 시선의 폭력과 사유의 폭력을 시인하고, 남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즉 내 생각과는 달리, 실제의 나는 정말 혐오스러운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우리 자신을 언제나 완전무결하고, 진리, 자유와 정의만을 부르짖는 영웅적인 존재로 지나치게 착각하고 있는 잘못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본질적 인간이기에 앞서 언제나 실존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2) 타자를 온전히 인정하고, 다른 생각들을 포용할 수 있을 때 오리엔탈리즘적 차별은 끊을 수가 있다. 어떻게 타자를 잘 이해할 수 있는가. 다음은 랭보의 시의 몇 구절이다.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누군가 나를 생각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말의 유희를 용서하라
나는 타자이다." 아르튀르 랭보「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보내는 편지中」
'나는 타자이다.'라고 말하는 랭보적인 코기토는, 타자에 대한 이해가능성을 전제하고, 주체 자체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의미한다. 내가 A를 이해하기 위해 A가 되어봄으로써, 그 타자와 관련된 세상이 열리고(개시開示-'나는 타자이다'라고 선언하는 동시에 그것과 관련된 개방적 타자의 세상이 열리고, 폐쇄적인 자아의 세계관이 닫혀버린다는 것) 그렇게 이해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랭보의 시 세계에서는 (내가 아닌 모든 것이 사물이라고 간주되던)종래의 편협한 철학관에 억눌려서 ‘광적’이라고 딱지 붙여졌던 모든 대상들이, 이제는 ‘주체’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찾는다. 타자를 인정하고, 차별을 끊는 것은 랭보가 그랬던 것처럼 타자가 되는 것에 있다. 나의 이성으로 수용할 수 없었던 타인의 생각들, 즉 ‘광기’들이 내가 타자가 되어 그 입장에서 생각을 나눠보면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늘 듣는 말이지만,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조언,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우면서도 진정한 소통의 길이자, 모든 차별이 시정되는 길일 것이다. 타자에의 이해가 결핍된 상황에서는 결코 차별의 해소와 평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더 나아가 타자의 광기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타자가 된다는 것은, 무수한 중심성을 상징하면서도, 중심이 없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가 이제까지 보던 세상과는 다른 또 다른 삶이 또 열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누군가를 차별하고 구분 짓기 위한 도구적 이성으로서의 인간의 능력이 아닌, 진정한 이성의 능력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타자가 되고, 타자가 내가 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나의 생각을 인정하고, 내가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것이 가능한 세상은, 무기력하게 동일화된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차별이 없는 다양성의 세계이고, 진정으로 진보된 사회고, 지금보다 더 고결한 도덕으로 무장된 사회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대사를 되새긴다.
"우리는 결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어. 다만 사랑할 수 있을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