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제목 없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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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떠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잠시 떠난 놀이터 그네에 멍하니 홀로 앉아 발을 구르며 그를 기다릴 뿐이었다. 나에겐 놀이터였을지 몰라도 그에겐 이곳이 단순한 공간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그의 부재에 마음이 쓰인다. 돌아오리라 믿으며 기다릴 것이다. 그때 내가 앉은 그네에 그를 앉히고 싶다. 어금니를 앙 다물고 어깨를 꽉 움켜쥐고 배시시 웃으며 잘 돌아왔다고 그의 등을 미약한 힘으로나마 밀어주어야겠다. 나의 힘은 미약하나 내 뒤에 선 줄이, 내 앞으로 새치기 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새치기라면 격하게 환영이다.

2
어제는 아버지의 생신이자 나의 생일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생신날 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음력으로 생신을 쇠 시고 나는 양력 생일을 쇠니 겹치진 않지만 이번 해는 날짜가 얼마 차이가 나질 않았다. 스물이 되던 해에는 음력과 양력이 같아지는 주기가 되어 같은 날 생일을 쇠었다. 마흔이 되면 또 같은 날 생일을 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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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 백숙집을 예약했다. 네 식구 입에 한 마리면 충분했지만 몇 달 후 새로이 맞이할 식구를 위해 두 마리를 예약했다. 씨암탉대신 오리누룽지다. 맛있게 먹으니 예약한 보람이 있다. 매제 될 놈은 비싼 코냑을 사 왔다. 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 좋다. 그놈을 데려오길 잘 했다 싶었다. 한참 드시다가 안 해도 될 말씀을 하시니 나는 미간을 조심스레 찡그렸다. 데우면서 먹으면 더 좋지 않으냐,돌판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었다. 집 앞에도 싸고 좋은 데가 있는데 굳이 여기까지 왔어야 했나,왜 집에서는 멋지지 않으신가 얼마나 남았다고 포장하냐...이 집은 다신 못 오겠구나...

3
집으로 돌아와 글을 썼다 지웠다 했다. 바람도 쐴 겸 담배도 피울 겸 비가 오는 것도 바라볼 겸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현관 너머 보이지 않는 통로에서 취객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이구 얼마나 술을 드셨기에,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 나의 과업에 집중했다. 용무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비를 맞고 널브러져 있는 아저씨가 눈에 밟혔다. 아버지 또래로 보였다. 낯이 익기도 했다. 괜한 오해나 더 큰일에 얽매일 수도 있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얼굴을 뵈니 같은 라인에 사시는 것 같았다. 손을 잡고 몇 호에 사시냐 물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힘도 세시다. 눈은 풀려있다. 내 손을 더 세게 잡으셨다. 나도 같이 더 세게 잡았다. 핸드폰이 보였다. 꺼낼지 말지 망설였다. 그 사이 경비 아저씨와 술에 취한 아저씨를 이곳까지 모셔온 술집 사장님이 오셨다. 이곳까지 모셔왔다고? 속으로 대단하시다 생각했다. 이제 증인이 옆에 있으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즐겨찾기를 찾아도 통화목록을 뒤져봐도 가족으로 특정 지을만한 연락처를 찾지 못했다. 두 군데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집이 몇 호냐는 계속되는 물음에 간신히 알아내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비밀번호를 제대로 누를 리 없었다. 경비아저씨는 이쯤 했으니 가자고 하셨다. 술집아저씨는 어찌 그냥 가냐 들어가는 건 보고 가야지 하셨다. 나는 내 할 도리는 다 했다 싶어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집으로 올라갔다. 계속 마음에 쓰인다. 웃옷은 젖어있었고 비가 오는 날씨에 찬바람을 맞으며 아직도 현관 앞에서 널브러져 계신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분명 집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보여 더 걱정되었다. 글도 안 써지는데 tv나 보자 했다. 동생과 함께 히든싱어를 보며 몇 번 문 안에 싸이가 있을 것이다를 두고 경쟁했다. 내가 다 이겼지만 아저씨가 눈에 밟혔다. 프로그램이 끝이 나고 다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 1층 대신 11층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다행이다. 아저씨는 안 계셨다. 사모님이 부끄러워서 문을 안 열어 주셨을까 나 혼자 그 찰나의 시간에 소설을 써 보았다. 해결된 것으로 보이니 스스로 안심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또 다른 마음이 쓰인다. 손을 잡아줄 수도 일으켜 세워줄 수도 없어 마음이 쓰인다. 물리적으로는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지만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음을 보이고 싶다. 나는 그저 그네에 앉아서 돌아왔다고 내 등을 두들겨 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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