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 아내님과 함께 극장을 찾았다. 싸우고 부수는 영화를 잘 못보는 아내님이 왠일로 전쟁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기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1917"를 예매했다. 뻔한 결말이 예상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엔딩 크리딧이 올라오는 순간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못한 채 몰입할 수 밖에 없는 영화 1917. 아직 2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로 기억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치 중이던 독일군이 하루 아침에 철수 했다. 후퇴하는 독일군의 뒤를 쫓아 사기가 떨어졌을 때 섬멸해야 한다고 생각한 22연대장은 총공격을 계획한다. 하지만 독일군의 후퇴는 영국군을 사지로 유인하려는 계략이었고, 공중 사진으로 이를 파악한 사단장은 병사 두 명을 차출하여 22연대장에게 공격을 중지하는 전령으로 보낸다. 22연대에 소속된 형을 구하는 것이 주목적인 블레이크와 자신의 안위와 천여명이 넘는 동료들의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는 스코필드. 그들은 적군의 주둔지를 가로질러 무사히 전령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전령이 받아들여져서 아군을 구해낼 수 있을까?
당초 주인공은 두 명이다. 명분(22연대에 형 있음 + 지도를 잘 봄)이 있어서 차출된 블레이크와 얼떨결에 그를 따라 나선 스코필드. 그들이 전령을 전달해야 하는 곳은 사지와도 같기 때문에 스코필드 입장에서는 거부하고 싶은 명령이었다. 더군다나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단 두 명의 병사만을 보낸다는 건, 이미 가능성이 없다라고 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박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임무를 완수하면 받게 되는 '훈장'과 '명예'라는 것도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스코필드 역시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이전에 받았던 훈장 역시 쇠붙이에 지나지 않다고 말하며 겨우(?) 와인 한 병으로 교환하기까지 한 것이다.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나의 가족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 외의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보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 공포감에 짓눌리거나 전쟁에 대한 반감으로 이탈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군인들을 동기부여시키는 것이 바로 '훈장'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 것을 위해,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명예'를 위해 목숨 걸고 전쟁터로 뛰어들게 된다.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문득 "태극기 휘날리며"가 생각났다. 동생을 전역시키기 위해 사지로 뛰어들며 '무궁훈장'을 받아 내려 했던 형. 하지만 어느 순간 순수했던 목적을 잃어버리고 전쟁광이 되어 버린 형.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 볼 수 밖에 없는 동생. 이래서 전쟁이 무서운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도 모르는 순간 인간성을 상실하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그런 비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형을 구하고 싶어 했던 유쾌한 병사 블레이크는 인정을 베푼 적군의 칼에 운명을 달리하고 만다.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이래나 저래나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영화를 보면서 한순간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주인공을 바로 옆에서 보고 있는 듯한 연출 덕분에 아내님은 무섭다며 나에게 가까이 붙어 앉았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긴장을 늦출 수 없던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권력'과 '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그릇된 확신' 때문이었다. 스코필드가 이동 중에 만난 장교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령관의 지령을 전달하라."고 충고 한다. 분명 이곳은 전시 상황이고, 아무리 상관의 명령이라도 작전을 통솔하는 대장이 이를 거부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총공격을 하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쉽게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려고 하겠는가? (예를 들면, 지금 비트코인을 사면 100% 오른다고 확신하여 대출까지 끌어서 구매하려는 사람에게 아무리 가족이 뜯어 말려도 듣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장면, 닥터 스트레인저 22연대장의 공격 중지 결정이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명령을 번복한 후 스코필드에게 "눈 앞에서 꺼져."라며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권력에 휘둘리지 않으며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진정한 리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왜란 때 그릇된 판단으로 이순신 장군이 훈련시켜 놓았던 정예 수군을 모조리 수장했던 원균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비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나는 이 장면을 끝으로 영화 내내 가지고 있었던 긴장감을 후련하게 내려 놓고 마지막 엔딩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 있었다.
1917을 보고 몇몇 후기를 보았는데 대부분 작품과 연출을 보는 듯하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의미에서도 충분히 사색하고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분은 백인 영화이기 때문에 역차별을 받아서 작품상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 "기생충"을 보지 못했기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두 작품 모두 훌륭한 영화임은 틀림없다.
Movie URL: (https://www.themoviedb.org/movie/530915-1917?language=en-US)
Critic: (A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