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도시가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곳에 걱정 거리라면 사막의 모래 바람 정도.
갑자기 제국으로부터 군대가 파견되었다. 이유는 야만인의 도시 습격을 대비한다고 했다. 군인들은 지역 수비를 강화하고 야만인 수색에 나섰으며 잡혀온 야만인들은 고문을 당해 죽거나 불구자가 되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고 야만인들이 두려워 도시를 버리고 탈출하는 시민이 속출했다. 군대가 증원되어 대대적으로 사막을 뒤졌으나 잡혀온 야만인은 소수였고 오히려 주력 부대가 야만인들에게 당했다는 소문만 들여왔다. 민심은 극도로 뒤숭숭해졌고 시내 주둔 병사들마저 패악을 부려 시민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당했다.
마침내 수색 총지휘자가 돌아왔으나 그는 어떤 언급도 없이 그곳을 떠났다.
이 소도시의 치안 판사인 '나'는 은퇴를 얼마 안 남긴 늙은이다.
취미라면 모래 사막에서 유목민들의 유물을 주워 모으는 것과 창녀를 찾아 하룻밤 회포를 푸는 것.
갑자기 들이 닥친 제국의 군사들 특히 고문 전문가 '졸 대령'의 등장은 불길하다. 직감적으로 야만인 소탕 작전이 전개되리라는 것과 그것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탄압의 형태이며 그로 인해 무고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걱정한다.
아니나 다를까 사막 어디쯤에선가 한 무리 부족이 잡혀 왔다. 졸 대령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는데 그 중 젊은 여자의 아버지는 죽고 그녀는 두 다리가 부러졌으며 실명하여 살아남은 부족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치안판사는 야만인 여자에 대한 죄책감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를 데려와 밤마다 씻기고 애무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실지로 자기도 그녀에게 뭘 원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건 말건 판사는 그녀를 부족에게 데려다 준다. 사막에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 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했다고 여기면서.
그러나 군인들은 야만인과 밀통한 혐의로 판사를 가두고 만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야만인의 공포는 소문에 소문을 만들어 냈고 두려움이 야기시킨 폭력성은 성문 밖 호숫가 가난한 고기잡이들에게까지 미쳤다. 그들의 갈대집이 불타고 이유없이 맞아 죽었다.
끝내 졸 대령은 야만인을 소탕하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와 도망가듯 달아났다. 판사가 꿈꾸는 세상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저녁인데...
J.M. 쿳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세계적인 소설가다.
<어둠의 땅> <나라의 심장부에서> <슬로우 맨> 등의 작품을 내었다. 번역자가 후기에 기술했듯이 소설이지만 사상록을 읽듯이 조금씩 떼어 읽어도 좋은 새겨둘만한 문장이 많다.
특히 독방에 감금된 판사를 묘사하는 장면이 매우 상세한데, 작가가 여러 시위에 참여하여 투옥당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듯 하다.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p66)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반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이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 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p230)
다시 한번 탐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J.M. 쿳시 / 왕은철 역/ 문학동네 / 2019 (원 1980)/ 13000원 /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