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여 종종 펼쳐 읽는 책이 있다.
다 읽은 책은 다시 읽을 때 처음부터 읽지 않고,
중간 부분을 딱 펼쳐서 내키는대로 읽고 덮는다.
오늘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발견한 문장.
해탈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이 다스려야 할 감정은 분노라고 했다.
아니다. 해탈을 방해하는 가장 강한 감정 중 하나가 분노라고 했던가.
분노는 그처럼 강하고 끈질긴 감정이다.
분노라는 감정은 나쁜 것일까?
분노는 왜 생기는 것일까?
물론 사람마다, 상황마다 각기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아니다.
천성이 온화하고, 침착해서가 아니라 그냥 참는 때가 많다.
또, 내가 화를 내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고 그러다보니 분노할 타이밍을 놓친다.
무엇보다 '건강하게 화내는 법'을 모른다.
어떻게 화를 내야, 분노를 표현해야 좋은 걸까?
그런데 문제는 내 안에 응집된 분노가 엉뚱한 곳, 엉뚱한 타이밍에 터진다는 것이다.
그럴 땐 스스로도 '이건 아니다' 싶은데 멈출 수가 없다.
소리를 지를 때도 있고, 울 때도 있고, 방 안에 숨어 멍하니 앉아 있을 때도 있다.
그렇게 나름의 방법으로 풀고 나서 금세 괜찮아지면 좋은데...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부침개 뒤집듯 뒤집어지지 않는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
내 맘이 풀릴 때까지 언제까지나 그 감정에 휩싸여 마냥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 감정과는 상관 없이 아이들은 놀고, 울고, 웃는다.
내가 비록 지금 굉장한 분노에 휩싸여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 있더라도
아이들을 먹여야 하고, 씻겨야 하고, 재워야 한다.
내 감정에 앞서 챙겨야 할 아이들, 나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것이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아이를 안고 '엄마도 사람이야, 너무 힘들어'라고 말해 보기도 했다.
엄마가 되면 저절로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그저 아이를 낳는 것으로 엄마가 되는 걸로 알았다.
그러나 엄마가 되는 건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점점 더 깨달아 가고 있다.
엄마가 나를 키운 이야기를 종종 들었었다.
지난 포스팅에 언급한 적이 있는데..나의 엄마는 무척 엉뚱한 장난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그렇다면 늘 밝고, 활기찼느냐....꼭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는 감성적이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결벽증.
그런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마주했던 일화들 중에는 슬픈 것들이 종종 있다.
속상한 것도, 가슴이 아픈 이야기들도 많이 있다.
그땐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로 넘겼었는데...
이제는 그런 이야기들이 귓등으로 들어지지가 않는다.
거기에 더하여 이제는 엄마가 느꼈을 순간 순간의 감정에 울컥하게 된다.
엄마를 이해하는 건 평생해도 끝나지 않는 일일 것 같다.
30대에는 30대의 엄마를, 40대에는 40대의 엄마를, 50대에는 50대의 엄마를 알아가는 것.
그것이 내 과업 중 하나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오늘도 사랑스런 두 아이와 복작복작 지내며 30대의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알게 되는 것들이 '행복'일 수만은 없겠지만, 그래도 슬픔은 아주 조금이기를...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즐겁기를 바라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늘 거기에 내가 보고 싶은 하늘이 있다.
그 푸르름은 때론 비를 내리고, 눈을 내리고, 반짝 반짝 빛나는 해와 달, 별을 내보인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면 내 키보다 훨씬 큰 나무가 든든히 버티고 서있다.
그 싱그러움은 그늘을 내어주고, 기대어 쉼을 제공한다.
고개를 바로 하여 앞을 보면, 까맣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보인다.
몸을 조금 낮추면, 거기엔 늘 나를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가 있다.
그 속에는 하늘도 나무도 꿈도 들어 있지만, 그 아이가 바라보는 모습은 오직 나 한 사람 뿐이다.
아이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늘 한결같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눈을 오래 오래 마주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나는 지금 '분노할 때'가 아닌 '사랑해야 할 때'이다.
아기 눈은
샛별 눈
또록또록
샛별 눈.
까아만 눈동자에
엄마 얼굴이 비쳤다
까아만 눈동자에
아빠 얼굴이 숨었다.
엄마 얼굴이 숨었다.
<아기의 눈, 임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