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의 머리에는 작은 뿔이 솟아 있었고,
굽고 털이 수북한 다리는 영락없는 산양의 것이었습니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괴물의 모습에
부모는 경악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를 산 속 깊숙한 곳에 유기합니다.
축복 대신 저주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은 소년.
소년을 키운 건 숲 속의 요정, 님프들이었습니다.
소년은 인간의 모습과 짐승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의 이름을 '판(Pan)'이라 지었습니다.
그리스어로 ‘모든’을 뜻하는 그 말은
이제 소년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흉측한 모습의 반인반수는 평생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사랑은 님프들에게조차 야멸차게 외면 받았습니다.
에코는 도망갔고, 프티스는 소나무로 변해 버렸으며,
시링크스는 갈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혐오와 비호감의 아이콘이 된 그는 끝없이 상처 받습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우울한 소년은 그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요정,
시링크스가 변한 갈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리에 자신의 상처 입은 영혼을 담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피리를 불 때 비로소 위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피해 낮에는 잠을 청하고,
아무도 없는 밤이 되어서야 밖에 나와 피리를 불었습니다.
그의 피리 소리는 애잔하고 음울했습니다.
패배자와 버림받은 자를 위한 멜로디가
어두운 숲에 울릴 때 마다
밤길을 걷는 나그네는 묘한 감흥과 함께
극도의 혼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팬 플룻(Pan flute)이라는 목가적인 악기와
공황을 뜻하는 패닉(Panic)의 어원이 같다는 점은
그런 면에서 아이러니합니다.
.
판의 외모와 피리라는 악기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회를 거치며
'공포'와 '두려움'의 이미지를 덧입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악마는 '산양의 뿔'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고,
피리는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처럼
사람을 홀리고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악기로 묘사되곤 합니다.
목자(牧者)를 뜻하는 단어, Shepherd의 또 다른 의미, '인도하다.'
슬픈 피리를 연주하던 '목자들의 수호자, 목축의 신 판(Pan)'과
아이들을 홀려 숲 속으로 인도했다는 '피리 부는 사나이'의
결말은 묘하게 겹쳐집니다.
그룹 <패닉(Panic)>의 이적.
그의 가명은 그 자체로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인터뷰에서 굳이
이(李)씨 성에, '피리 적(笛)'자를 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첫 단편소설 <지문 사냥꾼>의 에필로그에서
판(Pan)과 피리(笛), 패닉(Panic)에 대한
멋진 부연설명으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상처 받은 영혼을 위해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처음 결성한 밴드와 가명 간에
상당히 영리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둔 것이죠.
.
그리스 신화에서 하프와 음악을 관장하던
아폴로(Appollo)는 태양신이기도 했습니다.
따스한 지중해의 태양을 노래하는 그의 음악은
필시 위풍당당하고 경쾌하며 사랑스럽고 밝았을 테지요.
인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연주자로는
오르페우스(Orpheus)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가 죽은 아내 에우뤼디케를 찾기 위해
지옥 입구에서 류트를 연주하자 지옥의 문지기
케르베로스조차 이빨을 감췄다지요.
그의연주에 감동한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는
그가 지옥을 벗어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에우뤼디케를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호기심 많고 괴팍한 예술가였던
오르페우스는 결국 뒤를 돌아보았고
에우뤼디케는 영영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후 그의 연주는 더욱 슬프고, 애절해졌다고 하죠.

아폴로와 에우뤼디케
'찬란한 행진곡'과 '비련의 발라드' 사이에
'상처와 소외'를 말하는 판(Pan)의 음악이 있습니다.
평생 비주류로 자란 이의 고요한 울부짖음.
듣는 이들을 공황상태에 빠트릴 만큼 강렬한 음색의 노래.
'버림받은 자에 의한, 버림받은 자를 위한, 버림받은 자'의 음악.
생의 첫걸음부터 삶을 마감할 때까지
주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며 숲 속에서 혼자 아파해야 했던
소년을 위한 노래는
그때도, 그리고 여전히 그들을 위해 연주되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