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쌀이 떨어졌다. 지인의 추천으로 찾게된 쌀가게가 이제 단골이 되어서 쌀은 매번 같은 곳에서 산다. 쌀가게라기보다는 제법 큰 정미소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요즘은 이런 곳을 RPC라고 부르나? 집사람의 출퇴근 코스와 나의 출퇴근 코스를 비교하면 내가 가는 게 조금 더 낫다. 어차피 둘러가긴 하지만.
정미소 마당에 주차를 하고.
사무실에 들른다. 깔끔하진 않지만 더럽지도 않은 사무실에서는 친절하진 않지만 불친절하지도 않은 직원이 나를 맞이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전통시장 같은 곳에서는 쌀, 생선, 과일 등의 생필품을 사면서 카드를 내밀면 가격을 갑자기 높여부르거나 싫어하는 곳이 많다. 그런데 여기는 좀 큰 곳이라 그런지 카드나 현금이나 같은 가격을 받는다. 놀랍게도 카드를 꺼낼때나 현금을 꺼낼때나 같은 태도로 응수한다. 생글생글하지는 않지만 찌푸리지도 않은 그런 무표정으로. 난 이런 접객태도가 참 마음에 든다. 과잉친절에는 나도 과잉친절로 응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어 쓸데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대화를 해야하는데 이게 참 피곤하다.
영수증과 붙어있는 교환권을 갖고 사무실 바로 옆 쌀창고로 가면 아저씨가 아무말 없이, 정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교환권을 책상위에 있는 못에 푹 꽂는다. 못에는 이미 많은 교환권이 꽂혀있다. 예전에 극장에서 영화표를 그런식으로 받았던 것 같다. 그 아저씨는 창고 안쪽으로 가서 교환권에 찍혀있는 제품을 들쳐메고선 다시 내 쪽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차 쪽을 향하여 고갯짓을 한 뒤 묵묵히 걷는다. 매번 그랬듯이 이번에도 나는 얼른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다가 얼른 트렁크로 뛰어가 열어놓는다. 쌀이 털썩 소리를 내며 트렁크에 자리잡는다. 집에서 좀 멀긴 하지만 한 번씩 쌀을 사러 가면 이런 모습이 다소 낯설면서도 정겹다.
2018년 7월 기준 가격표
집에 가는 길에 매번 가던 주유소를 들른다. 매번 그렇듯이 이번에도 딱 3만원만 넣는다. 해당주유소 어플을 설치하면 나오는 바코드를 주유기에 갖다대면 3만원 주유시마다 1천원 할인쿠폰이 나온다. 그 다음부터는 3만원을 넣으면서 해당쿠폰을 사용해서 1천원을 할인받을 수 있다. 내가 쓰는 신용카드에서도 주유비의 5%정도를 할인해준다. 3만원어치 넣으면 쿠폰과 카드할인을 합하여 2천5백원 정도 할인을 받는다. 셀프주유소라서 별다른 부끄럼 없이 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 주유소의 주유기는 센서가 좀 이상한지 주유 총을 좀 살짝 잡아야한다. 강하게 잡으면 좀 들어가다가 멈추기 때문에 다시 놓았다 잡아야한다. 집사람보고 이런식으로 좀 넣고 오라면 기겁을 한다. 차라리 할인 안 받고 사람 있는 주유소에 가고 말겠다는 식이다. 나도 안다. 나니까 이런 식으로 사는 거지. 나 아닌 사람더러 두 번 이상 말 꺼낼 이유는 없다. 까짓거 할인 안 받으면 되지.
병원을 들를 차례다. 얼마전에 친구들과 술을 먹고 옆에 오락실이 보이길래 안하던 짓을 하다가 다쳤다. (돈을 넣지 않고)펀치머신을 오른손으로 툭툭 쳤는데 그게 느낌이 참 괜찮았다. 왼손으로도 힘주어 탁 쳤는데 손목시계가 풀리면서 왼손이 살짝 꺾였다. 그 이후로 왼손이 계속 아팠다. 이제는 가만있으면 괜찮은데 주먹쥐고 손가락에 힘을 줄 때 아주 아프다. 예를 들면 2L짜리 6개들이 생수병 묶음의 손잡이를 검지와 중지손가락에 걸치고 드는 경우.
네비를 검색해보니 5km이내에 수많은 정형외과가 뜬다. 대로변을 따라 4개의 정형외과를 봐 둔다. 첫 번째 병원을 지나칠 무렵 불법주차 된 차량이 많아 그걸 헤집고 들어갈 자신이 없다. 패쓰! 두 번째 병원을 지나치는데 주차장이 없다. 패쓰! 세 번째 병원을 지나치는데 역시나 주차장은 보이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옆 상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갔다. 병원에서 20여분 정도 기다렸다가 의사 얼굴을 15초 정도 보고 난 후 엑스레이를 찍었다. 당연히 아무 이상이 없다. 엑스레이는 뼈에 있는 문제만 비춰주니까. 다시 의사얼굴을 본다. 이번에는 2분가량 본 것 같다. 주먹을 꾹꾹 눌러보더니 이상이 없단다. "정 답답하면 MRI 찍어보든가, 오늘은 늦었으니 안되고 내일부터 나와서 물리치료나 받든가." 딱 내가 예상한 답변이다. 그러면서 진통제를 처방해준다.
처방전을 들고 40초가량 망설인다. 접수부의 직원에게 묻는다. "이거 무슨 약입니까? 예, 그거 진통제와 소화제입니다." 가만있을 땐 아프지 않은데 굳이 진통제까지 먹어야하나. 처방전은 그냥 꾸깃꾸깃 접어서 조수석 수납함에 던져놓는다. 아마 이 처방전의 약을 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간다.
트렁크에서 10kg짜리 웰바기 쌀을 꺼내어 낑낑대며 베란다까지 옮겨 놓는다. 당분간 일용할 양식이 될 24,000원 짜리 물건이다. 웰바기라는 제품명이 눈에 들어온다. 쌀 품종명일까 생각했는데 포장지에 혼합품종이라고 선명하게 인쇄해놓았다. 유행이 지난지 5년쯤 되는 단어, 웰빙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억지로 짜내어 '월박'이라는 단어의 변형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예전에 광고에서 국밥을 잘 먹던, 슬리퍼를 신고 히딩크 감독과 사진을 찍던 아들을 둔 누군가가 생각났다.
집 거실에서 쌀 자루를 들고 낑낑대는데 아이가 반가워하며 다리에 달라붙었다. 잠깐만 기다려 손 씻고 안아줄게. 쌀을 내려놓고선 손만 얼른 씻고 한 번 안아준다. 그리고 거실 바닥에 같이 엎드렸다. 놀랍다. 그림을 그리자고 하더니 자기 혼자서 무언가를 그린다. 지금까지는 나보고 '아빠, ㅇㅇ 그려줘, ㅁㅁ도 그려주세요'라고 한 뒤 내가 그린 그림에 색칠하는 정도였는데. 그림이 풍부해지도록 좀 다독거려본다. 우와 잘 그렸네 이건 뭐야? 아, 그래 머리카락도 그리면 더 예쁘겠다. 머리카락이 짧네? 너 이거 혹시 아빠 그린거야? 우와 어쩌고 저쩌고.
내가 알기로 이번 그림은 스토리가 있는, 내 아이 최초의 단독작품이다. 주제는 엄마와 아빠의 결혼이다. 엄마는 배 한가운데 꽃다발을 들고 있고 아빠는 이상한 옷을 입고 있다. 이후에 빈 공간에 자기 모습도 그렸다. 아이는 우리가 결혼할 땐 본인이 태어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성교육 동화책이 워낙 흔한 탓이다. 오른쪽 빈 공간에 '엄마 뱃속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의 모습을 그려놓고선 자기 모습이라고 말한다. 내 마음도 배부르고 차도 배부르고 내 손은 좀 아프지만 감동적인 퇴근길이다.
[숨쉬는 글] 일찍 나선 퇴근길: 쌀 사고 기름 넣고 병원가고 그림 그리고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