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운전하다가 후방추돌을 당해 병원을 다닐 때의 일이다. 팔과 다리가 많이 저리고 아픈데도 병원 진단결과는 "엑스레이 촬영결과 뼈 이상 없음, 물리치료 외에는 해 줄 게 없음"이었다. 아내의 물리치료 시간은 당사자에게는 즐거움 반, 지겨음 반의 여유시간이었지만 나와 아이에게는 좀 힘든 시간이었다. 여전히 엄마바라기인 아이는 3분 간격으로 "엄마는 언제 와?"라며 울먹거리곤 했다.
토요일 아침, 치료에 차도가 없음을 답답해하던 아내는 한의원 치료를 받으러 가야겠다며 아이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아직 내 정신의 절반은 꿈에 걸쳐있었고 나머지 절반이 "어.. 다녀와"라고 했던 것 같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아이는 이내 잠을 깼다. 남은 절반의 정신도 현실로 돌아와야했다.
시간을 오래 보낼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향한 곳이 대구 서구 평리동에 위치한 육아종합지원센터. 목적지는 건물 2층의 '체험실'이었으나 입장 시각이 정해져있어 도서실에서 대기해야 했다. 엄마의 병원행보가 영향을 미쳤는지 오늘은 갑자기 '병원책'을 골라서 읽어달라고 했다.
아이의 성장이나 취향변화가 느껴지는 순간은 참 반갑다. 작년에 여기 왔을 때는 '멍멍책, 애앵애앵책'을 보고 싶다고 했다. 경찰차, 소방차를 비롯한 탈 것들, 강아지와 고양이를 비롯한 가축들이 등장하는 사운드북을 들고 버튼을 열심히 눌러가며 다른 부모들의 곁눈질을 피해 소리를 흉내냈던 게 벌써 작년 일이다. 이제는 좀 더 복잡한 내용을 원하는 아이를 보니 묘한 느낌이 든다.
병원이 나오는 책을 찾긴 참 힘들었다. 이렇게 넓은 도서실이면 병원이나 질병을 주제로 한 동화책 세트가 있을법도 한데 곰곰이니 쥐돌이니 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생활동화 세트에서 하나씩 찾아내야 했다. 책을 읽은 다음에는 역할극이 꼭 따라온다. 제자리에 앉아 진료받는 건 항상 자기 몫이고 설치고 떠드는 의사역은 내 몫이다. 이렇게라도 의사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 해야하나.
건물내부는 맨발이나 실내화로 다니게 되어있다. 물론 엘레베이터 내부도.
시간이 되어 2층 체험실에 입장. 항상 지하철을 가장 먼저 찾는다. 기관사는 열심히 손님과 대화를 하며 어디로 목적지까지 태워다준다. 택시인지 지하철인지.. 어쨌든 덕분에 아이는 대구시내의 지하철 역 이름을 몇 개 말할 수 있다. 가끔 내가 아내와 대화할 때쯤 지하철 역이름이 나오면 유심히 들었다가 의외의 순간에 써먹는다.
다음 코너는 공사현장. 안전모도 있고, 안전조끼도 있다. 콘을 세워 공사장을 표시한 다음에 막대를 끼우고 벽돌블럭을 쌓는다. '너 혹시 그 블럭 말고 블럭체인이라고 들어봤니. 아빠가 말이야... 그거 사느라 2천만원을 넣었는데 말이야... 그게 2백만원이 되는 마법이 일어났단다. 신기하지?'
이런 공구와 작은 방이 딸린 작은 창고를 갖는 게 꿈이었다. 2천만원이 2백만원이 되기 전까진.
만들기 코너도 있다. 2개월에 한 번 활동내용을 바꾸는 듯한데 추석부터 세팅된 허수아비 만들기가 아직 그대로 있다. 이젠 내가 테이프만 붙여주면 될 정도로 혼자 잘 만든다. 문득 웃음이 난다. 내 손가락 마디 두 개만한 주먹으로 뽈뽈뽈 기어다니던 게 언제 이렇게 컸나. 앵- 에- 소리만 내던 자그마한 입에선 저 멀리 동화속 나라의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안에 작은 방이 있는데 지난번에는 볼풀이 설치되어 있더니 할로윈 특집인지 야광 조명 아래서 농구를 할 수 있게 해두었다. 아이는 농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건 아빠 닮지마. 아마도 아직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노는 것만으로도 충분한가보다.
옷을 입고 패션쇼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있는데 여긴 온갖 복장들을 입어볼 수 있다. 내가 어릴 때 어쩌다 가전제품을 바꾸는 날에는 그 박스에 테잎과 색연필로 본부를 만들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나만의 비밀공간을 서너시간을 상상으로 도배하여 운전기사도 되었다가 로봇을 조종하는 히어로도 되었다가 했던 것 처럼, 아이도 옷을 입으며 주변 공간을 상상의 힘으로 덮곤 한다. 체험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일 것이다.
옷을 살펴보니 아까 야광 조명이 방을 어둡게 밝히던 그 방은 할로윈 특집이 맞나보다. 지난번에는 공주와 왕자, 피터팬이 컨셉이었는데 이번에는 각종 영웅의 옷들로 채워져있다. 가면이나 모자, 요술봉 같은 디테일한 소품을 갖다놓은 세심함도 일반 키즈까페는 따라오지 못할 깨끗함도 아빠 입장에서는 매우 만족스럽다.
예전에 갔던 사진들과 좀 섞였다. 커튼을 치고 들어갔다가 짜잔! 하고 커튼 틈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곤한다. 하나도 놀랍지 않지만 놀란 척을 좀 하면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 놀란척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5분간 놀란척을 반복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긴 한다.
벽에 고무로 된 도형들을 붙이며 모양만들기도 하고...
밧줄다리를 건너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여기서만 볼 수 있는 블럭으로 도로를 만들기도 하고...
갑자기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아기를 달래며 집 청소를 하기도 하다보면 어느새 퇴장시간이다. 아이는 뛰어노는 맛에, 나는 아이 사진을 찍어대는 맛에 만족하며 집으로 향.............
....................하고 싶었다. 주차장 옆 놀이기구를 보고서는 또 거기 달라붙어서 갈 생각을 않는다. 아내는 이미 물리치료를 마치고 커피도 한잔 했고 친구들과 통화하며 수다도 다 떨었다고 한다. 언제 오느냐고 묻는 전화에 나는 "글쎄"라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