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공은 역사학인데, 사실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역사를 싫어하진 않았다. 좋아서 사학과를 택했고 이후로도 쭉 좋아했다. 다만 잘 모르는 데에는 어떤 한계가 있어서 그렇다. 내 관심사는 한정돼 있고, 역사라는 것은 워낙 방대하다. 멀리 갈 것 없이 동아시아로 제한해도 한국사와 중국사 이외엔 잘 모른다. 옆 나라 일본사만 해도 접할 기회가 드물어 몇몇 유명 인물과 사건 외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누가 역사 질문을 하면 그냥 아는 척을 한다. 별 문제도 없다. 물어보는 경우도 잘 없고, 묻는 분야도 정해져 있다. 십자군이나 프랑스혁명 정도를 묻는다. 까놓고 둘 다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아는 척은 어렵지 않다. 살라딘이나 리처드 1세를 말하거나, 루이 16세나 로베스피에르 같은 유명 인물만 언급해도 지식을 가진 전공자로 포장이 가능하다.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들도 전공 분야 이외엔 잘 알지 못한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동유럽, 서유럽, 아프리카 등등 전 세계 역사를 줄줄 꿰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이 각국사, 지역사 등등 얽히고 섥히고 때로는 단절된 방대한 역사를 통달하기는 극히 어렵다. 심각한 퀴즈 덕후나 역덕후라면 혹시 가능하다 해도 단편적인 지식 몇 개를 암기했을 뿐일 것이다. 일반적으론 관심분야나 전공분야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아예 까막눈이 된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우리들 대부분은 제한적인 지식만 갖고 있다. 사람들은 놀랍도록 무지하다. 밴드를 한다면서 전설적인 락밴드를 모르는 경우를 봤고, 영화를 찍으면서 나보다 영알못인 사람도 흔했다. 창작을 하면 감상을 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시간은 모두에게나 24시간이다. 그 분야만 평생을 파도 시간의 한계 상 완벽히 알기 어렵다. 그리고 자기 분야가 아니라면 말해 무엇 할까. 사람의 지식과 경험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는 것을 그저 아는 척 한다.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적이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이 점점 복잡해질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될 테다. 우리는 얕고 넓은 대화가 가능하도록 가벼운 교양을 쌓거나, 아는 척 하는 법을 배워야 할 수도 있다. 몇몇 이가 실제로 그러듯 교양과 스펙을 위한 경험을 수집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해서 ‘당신을 xx 전문가로 만들어 드립니다’ 시리즈가 나오기도 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hil&no=12999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227183
철 지난 유행이며 장난이지만, 일부분은 꽤 그럴 듯 하다. 척만 하는 ㅈ문가가 되어선 안되겠지만, 사람들 태반이 나만큼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으면 좋을 것이다.
아는 척 좀 하는 나지만, 정말 1도 모르는 분야가 많다. 그 전까지 그토록 떠들다가도 관련 얘기가 나오면 스님도 탄복할 묵언수행이나 럴커가 울고 갈 버로우를 해야만 한다. 내가 뭔가를 조금 더 안다고 상대를 무시해선 안 되는 이유다. 결국 나도 아무것도 모르니까.
사람들 개개인은 무식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총합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상사가 엄청나게 복잡해져 머리가 터질 지경이 된 지금, 이미 특이점이 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세상일의 몇분의 일이나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