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A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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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의 중독성은 엄청나다. 어설프게나마 수염을 실제로 길러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110% 이해한다 ― 그리고 그들만이 이해한다. 어떤 헤어스타일도 이 중독성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 남자들의 간사한 이방 수염도? 기른다는 생각 자체가 없이 그저 자르지 않았을 뿐인 잡초도? 그럼에도 있음과 없음 사이에는 무한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 머리의 경우보단 좀 못하지만. 그 중독성만큼 없을 때의 허전함도 엄청나다. 수염을 말끔히 깎고 나서 거울을 볼 때, 혹은 수염을 기르지 않았던 자신의 예전 사진을 볼 때, 그 민둥민둥한 얼굴은 허전함을 넘어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유비는 당대의 여느 인물들처럼 당연히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수염이 없는 편이었기에, 얼굴이 마치 엉덩이를 달고 다니는 꼴이라고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 비유는 오늘날에도 얼마나 완벽하게 와닿던가?
수염은 남성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다. 수염은 남성에게만 나기 때문이다. 사실 남녀의 몸은 다르지 않다. 있을 건 똑같이 있고 없을 건 똑같이 없다. 표면적 상징이 될 수 없는 아랫도리를 제외하면, 절대적 차이로 남는 것은 남성의 수염과 여성의 유방뿐이다. 물론 오늘날 남성성을 운운하는 것은 환영받지 못할 짓이고, 자연적 생식력과 연결 지어 그러한다면 개저씨나 야만인이라는 경멸을 각오해야 한다. 그것은 여성들이 유방에 대해 결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여성들이 자기 몸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때, 다른 '중립적'인 부위와 달리 유방에 대해 얼마나 적게 말하던가? 얼핏 완전히 개방된 듯 보이는 현대의 성적 담론은, 그러나 생식이라는 코드를 지우고 우회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연적 생식을 매개로 하는 성적 결합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현대 리버럴들의 주장 역시, 우리의 원초적 단어들을 야만적이고 죄스럽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수염이 계속해서 남성들에게 나고 유방이 계속해서 여성들에게 솟는 한, 이 원초적이고 야만적인 코드들이 사라질 일은 없다. 오늘날에도 원초적 코드들은 문화적 재맥락화를 통해 자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문화적 우회로를 거친 수염의 대표적 이미지는 마초와 자유다. 남성의 두 문화적 이상형. 체 게바라는 이 둘의 완벽한 결합이다. 유감스럽게도 둘 모두 한국 사회에서는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후자에 대해서는 인식 자체가 없다고 해도 좋다. 그저 반사회적 그지 깽깽이일 뿐. 한국인들이 환영하는 남성은 언제나 제복(흙 묻지 않은 걸로)을 입고 있다. 번듯하고 깔끔하며 안정적인 커리어맨. 반면 수염이란? 가장 안티커리어적인 요소, 전통적이든 현대적이든 남성적인 반항(외부자)의 기호다 ― 뭐라고 하는 거냐? 백수라는 거냐? 유감스럽게도, 수염의 콩깍지에 씌인 남성에게는 이런 싸늘한 시선들이 오히려 남성적 나르시시즘을 고취시키기도 한다. 그게 남성적 나르시시즘의 영원한 특징이니까.
수염은 야성적이라는, 야만적이라는 인상이 있다. 예를 들어 유럽사에 대한 이미지를 보면, 그리스·로마 문화 안에서 문명화된 남유럽인들은 말끔하게 머리를 다듬고 면도를 하고 있지만, 이 문명을 위협하는 북유럽의 야만인들은 거친 산발과 지저분한 수염 위에 뿔투구를 쓰고 도끼를 휘두른다는 식이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모태인 그리스 및 오리엔트 지역은 철저한 수염 애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유명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알렉산드로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풍성한 수염을 기르고 있다. 면도로 유명한 문화는 고대 로마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키케로, 아우구스투스는 모두 말끔히 면도를 하고 있다. 사실 지중해인들에게는 수염을 기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체모가 많은 인종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동안 수준 높은 문명을 꽃피운 이슬람권의 수염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를 고려해보면, 야만의 반대 개념으로 놓이는 고전적이라는 말에 더 어울리는 것은 수염, 그것도 풍성한 수염이 아닌가? 수염을 기르지 않은 자가 철학자란 말인가? ― 마지막 철학자는 하이데거다. 하기야 고전 문화와 고전적 철학자가 오늘날 어떤 남성적 매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백수일 뿐인데. 남성의 현대적 매력에 필요한 것은 오직 고전에 대한 약간의 교양뿐이다. 그 이상을 가진 것은 초라한 바르바로이일 뿐이다.
사람들은 수염이 어울리는 얼굴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문화사를 보면 오히려 반대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즉 수염이 없는 것이 어울리는 얼굴이 따로 있다고. 삼국지에 대한 문화적 재현들을 보면, 수염을 기르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환관이거나 특별한 미남뿐이다. 예를 들어 주유는 언제나 수염이 없는 곱상한 미모를 하고 있다.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 연결되는 것은 언제나 수염 없음이었다. 오히려 수염은 그 강렬한 존재감으로 외모를 잡아먹는다 ― 그것을 어쩌면 보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남성이라는 가면. 남성성은 여성성과 정반대로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터프함으로 그려진다. 물론 그런 터프함을 연출하는 수염이 실제로는 상당한 관리의 수고를 요구하지만 말이다.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머리가 실제로는 상당한 인위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수염에 대한 개개의 어울림이 아니라 수염에 대한 사회 일반의 암묵적 관점이다.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수염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 정설로 횡행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수천 년 동안의 한민족 수염사에는 미의식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말인가?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백인보다 못생겼다」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소리지만, 수염 같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되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유통되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수염 문제는 개개인의 미적 취향 문제가 결코 아니다. 이번 2018 월드컵에 출전한 32개국 중 수염을 기른 선수가 '한 명'도 없는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월드컵 공식 웹사이트 들어가서 참가국별 선수 사진을 쭉 훑어봐라. 인종적·문화적으로 가장 유사한 일본 선수단에도 심심찮게 수염이 눈에 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사실 삼국지의 재현 전통에서는 수염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는 부류가 하나 더 있다. '어림, 젊음'이라는 속성이 그 인물의 상징인 경우다. 관우의 아들 관평을 보라. 그는 독립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젊은 나이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관우의 아들로 정체화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미염공이나 주창과 달리 수염 없는 말끔한 얼굴로 묘사되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던 미주랑 역시 그 미모와 함께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죽었다는 점이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다. 젊은, 아니, 차라리 어린 느낌의 미모. 수염이 독립적이고 성숙하며 터프한 남성성의 상징이라면, 그와 반대되는 어리고 미성숙하며 유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수염을 없애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어린 느낌의 미모야말로 한국에서 남성이건 여성이건 환장하는 요소가 아닌가? 세계적으로 별난 수준으로 말이다. 물론 어린 외모의 한국 남성 아이돌들은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한국은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자랑스런 동안의 등불.
물론 이 분석은 젊은 세대에 대해서만 유효할 것이다. 현 한국의 장년·노년층조차 수염에 대해 보편적인 혐오감을 가진다는 점을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수염에 대한 그들의 언어 습관: 지저분하다, 거지 같다, 인민군 꼴이다 ― 장발 남성에 대해서도 같은 언어가 사용되곤 한다. 아마도 해방 이후 계속된 한국의 병영사회적 속성과 연결 지어 생각해볼 만하다. 수염이 가진 터프한 남성성이라는 이미지와 병영사회의 수염 혐오는 모순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군은 전근대적 남성성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때려잡아왔다. 같은 군복을 입고 있더라도, 한국적인 깔끔하고 각 잡힌 군인과 체 게바라는 정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군대(특히 근대 국민 국가의 군대)와 남성성 사이의 양가적 관계를 놓쳐서는 안 된다 ― 남성성 자체의 양가성도. 남성성 이야기를 빼더라도, 한국의 불도저식 근대화 앞에서 수염은 어떤 대안적 의미도 내세우지 못한 채 불결한 구닥다리로 뽑혀나갔으리라는 사실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 남은 마지막 수염의 기억은 시대의 흐름에서 탈락한 시골 노인네의 지저분한 염소 수염인 것이다. 이 역시 다른 나라의 근대화와 구분되는 점으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해방 후 한국(한국군)이 절대적으로 미국을 통해 서양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점 역시 이유가 되지 않을까? 20세기 미국은 유럽에 비해 눈에 띄게 수염이 없다. 예를 들어 2차 대전 시기에 영국의 체임벌린과 몽고메리, 프랑스의 페탱과 드 골, 독일의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과 비교할 만한 미국의 정치인이나 군인이 있던가? 물론 문화적 유행이란 휙휙 바뀔 수 있는 법이고 2차 대전 시기는 한국과 관계가 없으므로, 이 가설을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 2차 대전 이후 미국뿐 아니라 서양 사회 전체에서 수염이 눈에 띄지 않게 되기도 한다. 수염은 60년대의 문화 혁명과 함께 다시 전면으로 올라오는데, 이는 한국 사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조류였다. 한국은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수염을 기르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오지랖은 넘치고 취향은 획일적이며 편협하기 그지없는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세대를 막론하고 따가운 시선이 날아든다. 무엇보다도 대다수의 번듯한 직장에서는 그냥 불가능하다. 이게 코르셋이 아니면 무엇이 코르셋이란 말인가? 수염을 혐오하는 이유를 물으면, 한국인들은 지저분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자기 관리에 관심이 없는 태만한 인간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수염이 지저분한가? 수염은 곧 게으름과 태만함의 증거인가? 오히려 수염을 기르는 사람이야말로 수염을 관리하는 데 공을 들이는데도? 물론 자기가 그냥 싫어하는 외모에 정성스레 논리를 갖다붙이는 것, 청결 문제나 도덕적 문제(불성실이라는 근대 최악의 악덕!)를 결부시키는 것은 인간의 유구한 전통이고 타고난 본성이다. 사람들이 뚱뚱한 사람을 어떻게 느끼던가? 「단지 미적으로 맘에 안 드는 것이 아니다. 그는 더럽고 냄새나며 게으른 자기 관리 실패자다.」 수염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는 한국에서 근대라는 것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선진국의 근대인들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는 말자.
불결함과 태만함 이상으로 수염에 달라붙는 진정한 꼬리표는 위험함일 것이다. 조직에 온순하게 융화되지 않을 것 같은, 개성이 지나칠 뿐 아니라 귀찮고 사나운 마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안감. 이런 불안의 계열에서 수염은 염색보다 훨씬 위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며, 아마도 문신과 엎치락뒤치락할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 마초 사회를 운운하는 관점에서는 간과하기 쉬운 일이지만, 마초성이라 불리는 남성성은 근대 사회에서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자유로운 근대는 그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온순하게 길들여질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근대 학교는 어린이들의 몸뚱이를 의자에 앉히는 것으로 시작하며, 그를 견디지 못하고 말썽꾸러기나 문제아가 되는 것은 언제나 남자애들이다. 근대가 환영하는 남성이란 제복 입은 남성, 근대 조직에 완벽히 융화되고 전혀 위협적이지 않으며 근대적 매너를 갖춘 목양견이다. 튀지 않는, 야생의 수컷처럼 강렬하지 않은 길들여짐. 뿔 달린 염소들과 이빨 달린 늑대들은 저 멀리 쫓겨나거나 근대 국민군에게 총살됐다. 여기서 서양과 한국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근대화가 비교적 이르게 시작되고 완만하게 진행된 서양에서는 수염 및 전근대적 남성성이 어느 정도 남아 내려왔다. 200년의 근대화 동안 조직의 지배 계층이 수염을 기르고 결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양에서 이 전통은 급격히 단절된 적 없이 근대화의 조류와 완만히 섞여왔다. 또한 주류 조직 문화에 반해 수염을 기를 수 있는 여러 문화적 맥락 역시 계속해서 생겨났다. 반면 한국은? 전통도 없고 자유주의도 없는 근대 조직 사회는? 목양견들이 개가 되는 일이 있을 뿐이다.
신체발부수지부모의 전통 유교 문화가 수염 및 남성성과 어떤 관계에 놓이는지는 어려운 문제다. 일단 유교적 전통(선비)이 오늘날 어떤 미적 매력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일제 시대, 한국 전쟁, 불도저식 근대화를 거치고 난 후의 선비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거나 촌구석 사당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을 뿐이다. 반면 수염을 기른 서양의 전사와 귀족들은 여전히 미적 매력을 가지고 있고 오늘날 재생산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수염에 부여되는 남성성이라는 것이 유교 문화와 친화적인지부터가 의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남성성이라는 것이 이미 너무 서양적인 개념이 아닌지부터 물어야 한다. 또한 전통 문화라는 이름 아래 유교와 비유교적 동아시아 전통이 무분별하게 섞여 있는 것은 아닌지도 물어야 한다.
하여간, 이런 사회에서 수염이 받아들여지려면 이름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름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주방장이라고 하면 지저분한 동네 중국집에서 후라이팬을 휘두르고 있을 것 같지만, 셰프라고 하면 말끔한 선망의 대상이다. 문신에는 소름이 돋지만 타투는 그럭저럭 젊은 취향이다. 하지만 이 룬 마법은 수염에 대해서는 안 통하지 않을까? 그러면 더더욱 서양적 외모관 위에서 서양 수염들과 비교될 테니까.
그러나 곱지 않은 시선들을 무릅쓰고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면, 남의 시선 때문에 수염을 다시 포기하는 일은 드물며, 미적인 이유 때문에 포기할 일은 거의 없다. 수염의 중독성, 수염의 콩깍지, 수염의 나르시시즘은 그만큼 엄청나다. 그에게 닥치는 진짜 문제는 불편함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면도가 수염보다 훨씬 덜 불편하다는 사실이다. 전근대의 수염 애호란 결국 면도가 지극히 어렵고 위험했다는 기술적 사실의 결과다. 차라리 수염을 기르는 편이 덜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면도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고, 수염 나는 속도가 느린 한국인들에게는 더더욱 편하다. 결국 수염과 면도 중 어느 쪽이 얼마나 덜 불편한지가 수염에 대한 다수적 시선을 규정한다. 다수의 존재 방식은 결국 얼마나 편하냐 불편하냐의 문제고, 다수의 미적 시각은 결국 다수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의 문제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세계 어느 곳보다 수염에 부정적이라는 것, 그것은 한국인들의 타고난 눈이나 수염 모양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그나마 면도가 덜 불편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로망을 무릎 꿇리는 것은 언제나 편리다. 남성에게는 말이다. 그러나 이를 근대 조직에의 융화로 만들 것인가? 아직 알렉산드로스가 남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