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비용 제로사회] 라는 책을 생일선물로 받았는데 그 내용이 참 흥미로웠다.
초입부분정도만 읽었는데, 경제에 약한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자본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 스스로를 몰락하게 만든다는 내용인 것 같다.
기술의 급진적인 진보는 생산성을 급격히 올리고 있으며, 인간들은 계속해서 상식이 통하는 사회, 평화를 추구하는 선으로의 방향성을 향해 간다. 한계비용이 0으로 수렴한다는 이야기이다.
챗봇을 알아보면서 넘쳐나는 머신러닝 오픈소스는 물론이거니와 웹에 존재하고 있는 막대한 양의 정보들을 접하게 되었다. (영어가 짧아 매번 한탄하고 있지만... 한국어로된 정보덕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무료라는 것이다. 정보열람을 위해서, 강의를 듣기위해서 드는 비용이라고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수고로움 뿐이다.
의미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이것 또한 한계비용이 0으로 수렴하는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지식의 생산 및 배포의 한계비용이 줄어들고 있는 거 아닌가? 학벌주의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무너질 것 같다는 기분좋은 예감이다.
하나하나 수동으로 대응하는 챗봇을 만들어보면서 머신러닝 기술에 갈증이 생겼다. 관련 지식을 쌓기위해서 함수,벡터, 선형대수, 미분 같은 고등학생때 배웠던 내용을 떠듬떠듬 훑어보았다.
올라가야할 산이 높게만 느껴졌는데,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내가 공부해야할 거리가 줄어들었다.
세계에 분포해있는 공대 외계인들이 관련 기술과 정보들을 오픈해주고 있었다. 내가 할 것은 너무나도 간단한 프로그래밍 지식을 가지고 로직을 만들어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생각하는 것 뿐이었다.
특히 오늘은 챗봇관련 머신러닝 유튜브 강의를 알게되어서 기쁜마음으로 공부중에 있다.
언어에 대한 고민을 해보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에 대해 교양수준의 책을 사서 읽어보고 있다.
"말하여 질 수 있는 것에는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여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림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였다. 물질 세계가 있고 그것을 그려낸 그림이 있다.
인간의 사고가 세계라면 언어는 그것을 표현하는 그림이다.
그릴 대상이 없는 것을 그릴 수 있을까?
즉, 말할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사고들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친구와 '다수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하는 가' 에 대해 토론을 한적이 있다.
의견을 내놓으면서 느꼈던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게 이게 아닌데 자꾸 의미가 잘못전달 되는 현상이 있었다.
더군다나 토론의 결과나온 것은 다수와 소수를 따질 것이 아니라 권력위계를 따져봐야한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질문자체가 잘못 되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말할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명료하게 하지 않는 것은 자칫 비효율적인 대화활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지.
챗봇으로 언어를 처리할 것을 생각해보니,
형이상학적인 것들이 언어에 담기는 게 꼭 비효율적인 것은 아닌 듯 하다.
질문자가 개사이다와 같은 단어를 썼다고 가정을 해본다.(어쩌다 어른에서 보았던 예시)
개라는 단어와 사이다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개사이다라는 무지막지하게 시원한 어떤 느낌적인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상 개라는 단어가 그려내는 그림이 살아숨쉬는 개라는 동물이 아니라 빡세고 강한 어감의 느낌을 의미하고 사이다라는 단어가 청량음료 그 자체가가 아닌 이산화탄소가 따끔거리면서도 청량감을 주는 그 자극적인 느낌을 의미하고 있다.
형태소 분석을 할때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면 어떻게 형태소들을 처리해야 할까?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