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없는 돈과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전주에 갔다온 것은 한 영화에 대한 애정과 집념의 결과였다. 덕분에 지금은 900원짜리 명란마요 삼각김밥으로 연명하고 있지만 마음은 보다 풍요로워졌다.
계획은 총 6편을 보고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늦잠을 잔 탓에 저녁 6시가 넘어 전주에 도착하여 4편밖에 보지 못하였다. 다시는 알람 하나만 믿는 내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여튼, 미리 예매해두었던 영화가 7시 시작이었기 때문에 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 영화의 거리로 갔다. 다행히 꽤 넉넉하게 도착하여 여유롭게 티켓 교환 후 전주돔에 입장했다.
영화는 에두아르 바에르 감독의 ‘파리의 밤이 열리면’ 이었다. 제목부터 프랑스 냄새가 나는 이 영화는 공연 하룻밤 전, 돈을 주지 않으면 일하지 않겠다고 파업을 선언한 단원들과 공연에 진짜 원숭이를 올리라 요청하는 연출가에 쪼여 극장 운영주인 루이지가 돈과 원숭이를 찾아 거리로 나서는 내용이다. 프랑스 코미디 영화답게 귀여우면서 소소하게 웃음을 자아내어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였는데... 너무 힘들었다. 야외상영관이라 단차가 없었음에도 다들 잘 보는 것 같은데 내 좌석의 시야만 이상한 건지, 앞사람의 앉은 키가 많이 컸는지 자막을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빼고 이리저리 움직여도 자막을 볼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프랑스어라곤 봉쥬르 뛰따뻴꼬망(이름이 뭐예요) 정도이기 때문에 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대강의 상황과 장면으로 유추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좋았는데... 불어 공부 더 열심히 할 걸 뒤늦게 후회를 했다. 또 야외라 그런지 상영 중간중간 거대 나방이 내 시야에서 나풀거려 이성을 놓고 소리 지를 뻔 했다. 겨우 정신을 잡고 손을 파닥거리며 내쫓았다.
그렇게 고개를 빼고 조심스레 손을 퍼덕거리다 영화가 끝났다. 그 후에 공연이 있었는데 밤에는 기온이 똑 떨어진단 사실을 잊고 얇은 옷을 입은 나는 덜덜 떨며 편의점으로 뛰쳐나갔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몸이 따스한 것을 원했기에 컵라면을 재빨리 사먹고 다시 들어갔다. 라면을 먹으며 몸을 녹이는 사이 솔루션스의 공연은 끝났고 페퍼톤스의 공연이 한창이었다. 나는 페퍼톤스의 전곡을 꿰고 있는 팬이지만 괜시리 부끄러워 뒤에서 은근하게 리듬만 탔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다음으로 예매한 건 미드나잇 시네마, 심야에 영화 세 편을 연달아 상영해주는 프로그램으로 세 영화는 암고양이들, 인비저블, T2 였다.
‘암고양이들’은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의 로망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 중 한 작품이라고 한다. 사실 로망포르노가 뭔지 전혀 모르다가 며칠 전 ‘안티 포르노’ 의 예고편을 보고 충격을 받아 로망포르노에 대해 여러 검색을 하며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영화를 보는 건 처음이라 기대도 되고 떨리기도 했는데 수위가 예상보다 높았다. 당황스러웠다. 상상 이상이었다. 그래도 보다보니 점점 익숙해져서... 곧 평정을 되찾고 영화 감상을 했다. 메인 캐릭터는 총 세명으로 모두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인데 영화는 이들을 통해 인간관계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확실히 보기에 편한 주제는 아니지만 그 속에 여러 가지를 담아 재미있게 관람했다.
‘인비저블’은 오리올 파울로 감독의 영화로 정말 아무 정보 없이 본 영화인데 숨 참아가면서 봤다. 주인공들 사이에 거짓말이 오가며 절정으로 치닫는데 정말 굉장했다. 이 영화는 아무것도 모른 채 봐야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옆에 앉은 아저씨는 우후!! 라고 환호성을 보내며 열성적으로 박수를 쳤다. 조용히 동의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 모든 걸 제끼고 전주로 향하게 한 그 영화... 바로 ‘T2’다. 이 영화는 1996년 대니 보일 감독의 ‘트레인스포팅’ 의 속편으로 처음 이 영화 제작이 결정되었을 때 입을 틀어막고 방을 뛰어다녔다. 하지만 국내 개봉을 하긴 할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영화제 상영작에 T2가 떠서 쾌재를 부르며 이 날만을 기다려왔다. 영화 시작 전 경건하게 자세를 바로잡고 손을 모아 기다렸다.
영화는 전편으로부터 20년이 지났고 암스테르담에서 일하던 마크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다시 에든버러로 돌아오며 시작되는데... 음... 기분이 묘했다. 뵈는 것 없이 막 나가던 청춘들은 무능한 중년이 되었다. 이것이 현실이겠지, 아니 현실이라면 더 가혹했겠지 싶었다. 모두 그렇게 각자 현실에 순응(?)하여 살다 마크가 돌아오며 일상에 금이 가고... 제각각 속내를 숨기고 다시 뭉쳐 막장 짓을 하고 다니며 여러 사건을 벌인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정말 만족스러웠다. 전편의 팬이기에 기대가 컸고 때문에 실망도 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재밌었다. 정말 재밌었다. 오히려 전편의 팬이기에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보이는 부분들도 있고 인물들의 관계성이 더 잘 보여서 그랬던 것 같다. 음악들도 여전히 좋았으며 거의 모든 씬이 기억에 남을 만큼 재미있게 봤다. 식비와 잠을 줄여가며 전주까지 오길 정말 잘했다.. 나 자신이 대견하다..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즐거웠고 아침에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도 기억이 휘발되기 전 열심히 메모를 했다. 앞으로 며칠간은 쭉 lust for life를 들으며 choose life... 라고 아련하게 중얼거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