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일까요, 제주에는 거세게 바람이 붑니다. 앞마당에 핀 목련은 자태를 뽐낼 시간도 없이 바람에 흩날리고 매화도 거의 다 지고 없습니다. 가끔씩 이렇게 역행하는 계절을 만나면 변심한 애인을 만나는 것 같아 당황스러워요.
그나저나 바람에 떨어지는 건 꽃으로도 충분할텐데, 다시 웃풍이 드니 엉덩이 붙이고 앉아 글을 쓸 의욕도 떨어지네요. (네, 압니다. 이거 변명이고 핑계라는 거.)
사실 요즘은 글을 쓰려고 앉으면 깜박거리는 커서가 그렇게 보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연필로 끼적이거나, 타자기로 퉁탕퉁탕 치고나서 어느정도 정리가 되면 컴퓨터 앞에 앉는 편인데 요즘은 이러나 저러나 막막한 기분은 매한가지네요.
개무룩
저는 직업 특성상 영상 대본, 보도자료, 기획기사, 온라인 콘텐츠 등 고정된 포맷의 글을 많이 씁니다. 이런 류의 글을 쓸때는 의식적으로 기능인 스위치를 켭니다. 그래야 일을 효율적으로 빨리 끝낼 수 있거든요. 익숙한 용어, 익숙한 문장, 익숙한 장면, 익숙한 구성... 물론 클라이언트가 다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똑같이 쓰진 않지만, 적당한 익숙함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노하우가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일을 마치고 시나 소설을 쓸 때도 저도 모르게 비슷한 업무 알고리즘(?)을 적용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코딩...코딩을 다시해야 하나..). 단어의 배열 방식이라든가.. 이미지의 재활용... 식상한 클리셰.. 한참을 공들여 썼는데 재미도, 새로울 것도 없는 결과물을 보면 참담하고 답답합니다.
문학에도 늘 새로운 것만 써야 한다는 절대적인 법은 없겠지만 (아마 대신 작가의 자기검열 같은 게 있겠죠.) 같은 것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유연함에 대해 아직은 많은 갈증을 느낍니다.
깜냥이 안되는 건지, 퍼내기만 하고 채우지를 않아서인지, 그냥 일시적인 무기력인 건지... 써야하는 글과 쓰고 싶은 글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어야 하는 사람의 지병인건지.. 이런저런 잡생각에 그저 오늘은 내가 알고 있는 익숙한 언어와 이별하고 싶다는 생각만 드네요.
가끔 이렇게 내가 쓰고싶어 쓰는 글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때면 며칠을 백지 앞에서 머뭇거리게 됩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다시 회복해서 쓰고 싶은 글을 쓰게 되는 패턴이지만요. 수년간 이걸 겪으니 이젠 글쓰려는 마음을 접기 보다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로 상황을 넘기고 있는 절 발견하게 됩니다. ㅎㅎ
암튼..이런 넋두리 글을 쓰기 전에 노느니 예전글이라도 뭐 올릴거 없나 블로그를 뒤적이다가 16년에 쓴 글을 발견했는데요. 이때도 지금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ㅋㅋ
(미안하다 과거의 나. 나는 여전히 발전이 없어)
오늘은 조금 게을러도 된다고
흐린 하늘이 나를 속였다
창 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겨울비 젖은 억새처럼
피곤을 털고 책상 앞에 앉았다
밤새 머리맡을 기웃거리던
말들을 모았더니
꽤나 그럴듯한 오솔길이 되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그 길을 산책한다
엉성하게 놓인 돌을 밟고
듬성하니 핀 꽃을 보고
그 위를 지나는 구름을 보고 웃는다
마침내는 길 끝에 서서
그 길을 예쁘게 두고
한동안은 걷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나의 것은 없는 언어
나의 것은 없는 풍경
내가 없는 펜의 궤적
내가 없는 시의 거리
익숙한 것과 산책하듯 작별하는
11월의 마지막 밤
괜한 부지런을 떤 몸뚱이를 누이며
베갯잇에 스며들 상념을 기다린다
다른 작가님들은 글쓰기가 막히거나 본인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을때 어떻게 해결하시는 지, 갑갑함을 어떻게 해소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여기 불쌍한 중생을 구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