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의 아침묵상 / 2017. 6. 17 (토)
■ 열왕기상 18:1-15
[ 자기만 아는 아합과 선지자들을 섬기는 오바댜 ]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온 땅에 가뭄과 기근이라는 심판을 선포하신지 제삼년에 다시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통해 비를 내려주실 것을 말씀하시며,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고 하십니다(1). 가뭄의 기간을 정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엘리야 시대의 가뭄이 삼년 반동안 계속되었다고 기록되어있을 뿐입니다(눅4:25, 약5:17).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그릿시냇가에서 엘리야 본인의 생명을 통해, 그리고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 아들의 생명을 통해 경험하게 하신 후에, 그 주권자 하나님을 아합왕과 모든 이스라엘 가운데에 선포할 수 있도록 다시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야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붙잡고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에게로 나아갈 무렵에도 가뭄과 기근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2).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고 있는 아합과 사마리아 온 땅에도 주권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근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와같은 가뭄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이미 엘리야로부터 하나님께서 징계하심으로 비도 이슬도 수년간 내려주지 않으실 것임을 들었으면서도(17:1), 그는 온 땅을 두루 헤매며 물의 근원을 찾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이는 가뭄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을만한 믿음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합의 어리석음은 이미 풍요의 신이라 불리는 바알 숭배가 허구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합을 어리석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이 풍요의 신이라고 하는 '돈'을 추종하며, 믿음의 본질마저 잊어버리고는 정작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문제의 원인을 '돈의 부족'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전혀 찾으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돈을 신봉하는 삶의 허구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우상숭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빠져 나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을 세상 가운데 증명해 보이는 인생으로 쓰임받도록 파송받은 자들입니다. 풍요의 신 바알, 풍요의 신 돈 앞에서 춤을 추며 비를 내려달라고 호소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합이 다스리는 북이스라엘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아합의 궁내 대신인 오바댜로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3). 이러한 오바댜를 보며 우리가 현재 처해있는 상활을 변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우상숭배와 음행이 일상화 되어있는 북이스라엘에서, 이렇다할 선지자도 없었고 하나님의 성전도 없이 곳곳에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의 형상들과 산당들만 가득한 곳에서, 그것도 죄악의 가장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아합의 왕궁에서 대신으로 일하고 있는 오바댜가 하나님의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결코 어둠으로 빛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바댜는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선지자 오십 명씩, 모두 백 명을 굴 속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여왔습니다(4). 이는 자신의 모든 재산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선지자들을 구하기 위해 바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오바댜를 통해 엘아합을 선지자 엘리야에게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즉, 북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고 바알의 선자들과 아합과 악녀 이세벨을 멸하는 영적전쟁의 선봉에 설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대 가장 악한 왕 옆에 이처럼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를 붙여 주셔서 선지자들을 보호하도록 하신 것도 주권적인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는 그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합을 그의 궁에서 이끌어 내어 오바댜와 더불어 동행하여 물의 근원과 내가 있는 곳으로 가 꼴을 찾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합은 오바댜에게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5). 짐승이 먹을 꼴도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면 농작물을 오랫동안 구할 수 없는 사정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백성들의 삶 보다는 자신의 소유를 유지하는데만 진력하고 있습니다. 나의 소유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면 바로 옆에 있는 고통받은 이웃도 하나님의 뜻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르밧의 과부가 마지막 남은 음식을 먹고 아들과 함께 죽을 것을 생각하고 있었듯이 오랜 가뭄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죽음 직전에 이르고 있었음에도, 아합이 왕으로서 자신의 소유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물욕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뜻마저도 분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의 근원과 시내를 찾아 꼴을 구하며 아합과 각각의 길을 다니고 있을 때에, 오바댜는 선지자 엘리야를 만나게 됩니다(7). 그리고 엘리야는 오바댜를 향해 "네 주께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고 전하도록 합니다(8). 그러나 오바댜는 그 말을 아합에게 전했다가 엘리야가 다시 사라질 경우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합니다(9).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가뭄 속에서 고통을 견디어가며, 목숨을 걸고 선지자들을 굴 속에 숨겨두고 보호하고 있었던 자신과 달리, 선지자라 하는 엘리야는 혼자 숨었다가 이제야 다시 나타난 것에 대한 원망의 마음도 배어 있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도망가서 사라질 경우, 아합에게 보고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오바댜 자신에게 돌아 올 수 있음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그의 생각에는 엘리야가 아합이 두려워 숨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엘리야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것입니다. 오바댜의 증언에 의하면 아합은 엘리야를 잡기위해 손이 미치는 곳이면 모든 나라와 민족들에 이르기까지 찾았고, 보지 못했다 할 경우에는 맹세까지 하게 함으로, 숨겨줄 경우에는 보복을 감수하도록 하는 조치까지 취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10). 이러한 아합의 무자비한 폭정에 대한 공포심이 자신도 모르게 깊이 파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포심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지자 백 명을 굴 속에 숨겨 놓고 먹이고 보살피고 있었다고 기록한 것을 보아, 만일 엘리야의 일로 자신의 신상에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굴 속에 있는 백 명의 선지자들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바댜가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라고 말하면서도(12),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엘리야에게 묻는 데서 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13). 엘리야는 이러한 오바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임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아합에게 자신이 나아갈 것을 확인해 줍니다(15). 오바댜는 어떤 것을 누릴까를 근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생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 나의 기도 >
하나님, 모든 문제의 원인을 돈의 부족으로만 보는 불신앙을 회개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엘리야와 같이 확신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세상 가운데 살아계신 주권자 하나님을 선포하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