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싸움의 시작
면접볼 때 상무님이 나한테 물었던 것이 있다.
"직장 상사와의 관계가 힘들 땐 어떻게 할거에요?"
일반적인 인성 문제겠거니 싶어 취업용 책에서 나올 법한 대답을 했는데, "힘들 땐 나를 찾아와요." 라고 하더라. 그 말의 의미를 입사하고나서야 알게 됐다. 입사 후 3달 동안은 언제든 회사에서 날 짜를 수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일단 참았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다른 팀 사람들이 고기와 술로 우리를 진정시켜줬다. 그렇게 3달이 지나고, 우리는 팀장이 자리에 없는 틈을 타 상무님 방에 쳐들어갔다.
상무님, 저희 너무 힘들어요!!
상무님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안경을 벗으시며, 대체할 사람을 찾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그 날은 당장이라도 문제가 해결이 되는 줄 알고 신이 나서 축배를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팀장에게 지칠 때마다 우리는 상무님에게 찾아갔지만, 기다리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디렉터인 로건에게 찾아가보기로 했다. 그는 예전에 여러번 팀장에게 Shut up! Get out!이라고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고 들어서 뭔가 사이다 같이 해결해줄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로건은 상무님한테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보라고, 조만간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한달이 지나갔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HR팀장에게 면담을 요청하기로 했다. HR쯤 되면 뭔가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다고 말을 하면 해결을 해주겠지. 그런데 HR팀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노팀장이 좀 힘든 구석이 있지. 근데 자기들, 여기 힘들지 않은 사람 없어요. 자기들만 힘든거 아니야. 사람 관계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데 그래요. 다 참고 하는거지.
뭐 이런 신박한 개소리가 다있지?
그제서야 상무님과 로건, 그리고 HR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을 눈치챘다. 맛있는거 먹이고 잘 다독여서, 퇴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을 뿐,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시발, 지들 일 아니라고.
진절머리나게 찾아가면 뭐라도 해주지 않을까 싶어, 정말 끊임없이 찾아갔다.
1년 정도 힘들다고 찾아오니, 상무님도 HR팀장도 드디어 자기가 우선 팀장에게 팀원들이 힘들어하니 자제하라고 말해보겠다 했다. 1년이나 참고 다니다니, 나새끼 존나 뿌듯하다. 좀 나아지려나 기대도 했지.
그렇게 더 큰 시련이 왔다. HR팀장과 면담을 하고 온 팀장은 안그래도 하얗고 마른 얼굴이 시체처럼 되서 돌아왔다. 눈만 마주치면 말을 시작하고 보던 여자가 갑자기 말한마디를 안하고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이메일로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우리와 면담을 좀 해야겠다고 회의실에 데려갔다. 뭐가 가장 힘드냐고 하길래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근데 또 다음날도 면담하자고 회의실에 들어가 또 똑같은걸 물어본다. 1주일 동안 면담으로 괴롭힘당하는 기분이었다. 면담 한 번하면 자그마치 3시간이었으니.
그 사람은 로봇처럼 힘들다고 했던 부분들을 다이어리에 하나하나 적어댔다. 한동안은 잠잠했다. 말을 안하려고 노력하고 메일로 업무지시를 하니 퇴근 시간도 빨라졌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다시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자기 합리화를 시작한 것이다. 회사가 개발자들만 있어서 스스로 자기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라 했다. 말이 많은건 "호흡이 남들보다 조금 길 뿐"이라고 했다. 호흡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팀장과 같이 일을 하는 방법에 대해 제안을 했다.
입사동기 홍은 로건한테 "Fire her or fire me."라고 외쳤지만, 로건은 둘다 안된다고 했다. 외국계면 더 칼같이 사람 해고할 줄 알았는데 여긴 좀 이상하다. 이 X같은 회사는 사람을 해고한 적이 없댄다. 우리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상무님에게 다시 찾아가 3가지 제안을 했다.
- 팀장을 바꿔달라.
- 그게 어려우면 디자인팀을 해체해달라.
- 그것도 어렵다면 물리적으로 자리를 떨어뜨려놔달라.
상무님은 세번째 방법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디자인팀 해체나 팀장교체는 HR과 이야기를 해봐야하는데, 잘 될 것 같지 않았겠지. 참고로 상무님은 싸우는 걸 싫어하신다. 3번째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며, 팀장과 나, 입사동기 홍, 상무님까지 넷이 근처 카페에 들어가 사자대면을 했다. 상무님은 팀장을 잘 설득할 생각이었는데, 자꾸 감정싸움마냥 질질 끌리기만하니, 3시간이 지나서 상무님은 통보식으로 말을 했다.
다음주 월요일에 자리 옮기는걸로 알아. 더이상은 나도 못하겠다. 내가 매니저니까 내가 하잔대로 해.
그 다음날 팀장은 HR에 찾아갔다. 메일 쓴 것을 어쩌다 보게 됐는데, 모함을 하고 있다며 도와달라 하더라. 내가 싸가지없게 항상 말대답을 하는데 자기가 버릇을 고치려고 말한 것을 상무님이 오해하고 있다는 식이었다. 와씨. 지가 하도 나한테 잘못 뒤집어 씌워대서 근거자료 바로 찾아 보여주는게 말대답인가? 아무튼, HR팀장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리 옮기는것에 반대를 했다. 아마 회사 분위기를 망치는 행동이라 생각했겠지. 그렇게 1차 자리 옮기기는 실패했다.
우리는 또 상무님에게 이유만 그럴듯하게 바꿔 자리 옮기기 제안을 다시 했다. 디자인팀은 11층에 있었는데, 대부분의 연구소 사람들은 10층에 있으니, 시너지를 위해 디자인팀을 10층으로 다 내려보내달라고 했다. 마침 다른 지역에 있던 연구소 사람들도 우리 빌딩으로 이사하게 되어서, 다 같이 자리를 옮길 것이니 그때 반영해주기로 했다. 드디어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고맙게도, 새로이 배치된 자리를 보니 팀장만 자리가 동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힘들어했던 것 중에 하나가 마이크로 매니징이었는데,면담 사건 이후로 자신은 실무에서 손을 떼겠다 했다. 하지만 당시에 일이 크게 없었던터라, 실무에서 손을 떼고 안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새 프로젝트가 생겼고, 팀장은 나에게 고객 커뮤니케이션부터 업무까지 전부 맡기고 보고만 받기로 했다. 별 일 없겠거니하며 신나게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 여자가 이제는 보고충이 되어서는 시도때도 없이 보고를 하라고 했다. 보고 양식을 만들어서는 찾아오지말고, 양식에 맞춰서 설명을 해달라 한다. 정말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이건 보고 안하나요? 이건 어떻게 된거죠? 이해를 못하겠는데 다시 보고하세요. 일해야되는데 자꾸 보고하라고 해서 일을 못하겠었다. 썅. 인내심 테스트인가. 짜증나는건, 이슈 메일에는 항상 팀장이 참조로 껴있어서 그 메일 내용만 봐도 이해가 될텐데, 그 메일은 안보고, 지가 만든 보고양식에 정리해서 보고해야했다. 메일 보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하더라.
나는 실무를 안하기로 했으니 자기가 설명을 나한테 해줘야하는거잖아.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건가? ... 우리는 또 다시 상무님 방을 두드렸다. 상무님에게 죄송하지만... 팀장이 실무에서 손 안 떼면, 우리도 일하지 않겠다고 반협박을 했다. 발등에 불 떨어진 상무님이 팀장한테 이야기해서 우리는 또 해냈다. 그 때, 회사 다닌지 2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디자인팀 해체
사실상 업무는 모두 분리가 되었지만, 아직 남은 것이 하나 있었다. 여전히 그 사람은 나를 인사평가하는 팀장이었다. 문제는, HR에서 이것만큼은 못하게 하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너무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복수하겠다고 고과 안주면 노동청에 신고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 HR도 어쩔 수 없이 해체시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던 와중에 목디스크가 심해져 약 2달간 휴직을 하게 되었다. 순둥순둥한 홍을 두고 가자니 미안했지만, 나부터 살고 봐야겠었다. 미안해 친구야.
행운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왔다. 나중에 들었지만, 우리의 고통을 알고 있던 다른팀의 차장님이 몇 달 동안 건의했다고 들었다. 쏘스윗. 상무님은 우리를 위해 HR과의 끝없는 싸움을 했고, 그 만고 끝에 드디어 디자인 팀이 해체되었다. 휴직하고 돌아오니까 팀장이 바껴있었다. ㅋㅋㅋㅋㅋㅋ입사 후 2년 반. 이 기나긴 전쟁에도 끝이 오고 있었다.
이렇게 힘든데 그냥 퇴사할까?
솔직히 더러워서 시발그냥 한 대 세게 명치 쌔리고 침뱉고 퇴사하고 싶은 날이 정말 많았지만, 홍을 두고갈 수 없었던 게 크다. 홍은 처음 만났을 때 참 밝았는데, 입사한 다음날부터 2년 동안 하루도 슬픈 눈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편이었지만, 홍은 팀장에게 말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누울자리 보고 발 편다고, 팀장도 나보다는 홍을 더 많이 괴롭혔다. 내가 나가면 홍이 힘들어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 누구하나 퇴사하게 되면 무조건 동반 퇴사하자고도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2년간의 기나긴 싸움을 하며 퇴사, 조직에 대해 정말 많이 깊은 대화를 나눴다. 나와 홍은 사회가 바라는 문제가 있어도 순응하며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스트레스가 너무 많이 쌓여서 퇴사하고 싶은 순간이 많이 왔지만, 스트레스는 퇴사를 결정하는 원인이 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는 회사가 아니어도 받는다. 그냥 내가 나고 자랄 때 언제나 항상 같이 있는거다. 어딜가나 기쁨만 있는 삶은 없다. 소확행이란 말이 생긴 것처럼, 스트레스도 있어야 기쁨도 있는거라고 생각한다. (못알아듣겠으면 inside out 애니메이션 한번 보고 오길 바람) 그런데 왜, 뭐하러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지? 어차피 스트레스 받을거, 회사에서 그냥 적당히 일하다가 적당히 퇴근하고 월급받을 때 기쁘고 이러면 되는거 아닌가? 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나는 적당히 일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내 좌우명인 Life is what you make of it.처럼 언제나 내 인생을 값어치 없이 적당하게 살지 않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렇기에, 결론을 내렸다. 회사라는 조직에 순응하느니, 조직으로부터 독립을 해보자. '내가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는 진짜 내 인생을 만들어보자'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