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of this content has low reputation.

[원고들] 탱크를 막아서다—칸트와 프로이트의 동전

ai2000(-1)
Published in
#kr
Words
770
Reading
4 min
Listen
Play
8y

탱크를 막아서다

—칸트와 프로이트의 동전

/

1989년 여름 중국에선 민주화 요구를 내건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중국 정부에서는 6월 4일 이를 무력으로 강경 진압할 것을 명령내린 <천안문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들의 광주학살처럼 계엄령을 내린 뒤 인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총격이 이뤄졌죠. 정보가 철저하게 탄압되는 중국이니만큼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된 사망자 통계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적게는 180명, 많게는 1만여 명이라는 불분명한 추정치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사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6월 5일 천안문 광장으로 진주해 들어오던 탱크 4대를 맨몸으로 막아섰던 이른바 <탱크맨(Tank man)>일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탱크에 깔려 죽었다던가, 이름이 왕웨이린이라던가, 또는 이후 정권에서 내린 밀령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등의 온갖 루머들이 나돌았지만, 2017년 홍콩 주재 중국 인권민주화운동정보센터에서 확인해주길 탱크맨은 천안문 사건 이후에도 망명하지 않고 본명을 숨긴 채로 은거 중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1 민주주의와 시민불복종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는데, 살아있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저는 이 탱크맨을 칸트의 선의지(guter Wille)를 얘기할 때 종종 예시로 듭니다. 『도덕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칸트가 <세상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밖에서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2라고 강조했던 바로 그 선의지 말입니다. 이런 선의지의 유일한 잣대는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난 그 무언가라는 것인데, 이런 경향성에는 이기주의나 명예욕 외에도 자기안위라던가 건강 같은 소박한 덕목들도 모두 포함됩니다. 칸트는 선한 행위란 이런 경향성을 실현하거나 성취하기 위한 부속품이 아니라, 오로지 선한 행위 그 자체로서 추구되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했죠.

선한 의지는, 그것이 실현하거나 성취한 것 때문에 또는 그것이 제시된 어떤 목적들을 제대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려고 한다>는 것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하다. 그리고 선한 의지를 그 자체로 볼 때, 어떤 한 경향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더 나아가 모든 경향성을 합한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행복해지기 위해] 그 선한 의지가 실행하는 어떤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존경받아야 한다. (……)선한 의지는 보석처럼 자신의 완전한 가치를 자기 안에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빛날 것이다.3

탱크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무력 차이 앞에 저항하겠다는 것은 자기보존 본능을 통째로 갖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미친 행동, 즉 광기입니다. 그렇다고 성취되는 리비도적 만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지켜보는 사람도 거의 없기 때문에 탱크맨의 저 행동을 영웅심리라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사진이 찍힌 각도로 미뤄보아 탱크맨 본인은 애당초 사진이 찍힐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을 겁니다). 참고로 민주주의의 실현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윤이 되기 때문이라는 윤리적 이기주의자들의 설명은, 적어도 저 사진이 찍히던 순간에서는 전혀 유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 순간에 탱크맨은 윤리적 신뢰를 통해 도모해볼 장기적 미래 자체를 박탈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죠. 즉 이기주의가 개입할 틈도 없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적어도 저는—그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행한 선의지의 발현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이런 선의지와 경향성의 칸트적 도식을 프로이트 식으로 번역 해보고픈 욕망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이기주의와 자기안위에 봉사하는 경향성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현실원리와 쾌락원리에 손쉽게 대응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탱크맨은 이런 범주로 이해할 수 없는 보다 깊은 무의식의 영역, 『쾌락원리의 저편』에서 프로이트가 <쾌락으로서 느껴질 수 없는 쾌락>이라고 불렀던 욕망의 지평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4—훗날 라캉이 <향락(jouissance)>이라고 부를 개념에 다가선 것이죠.5 그러니까 칸트적으로 해석된 탱크맨을 다시 프로이트적으로 해석한다면, 탱크맨은 선의지라는 욕망을 관철한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칸트와 프로이트이 윤리적 형식은 분명 다릅니다. 칸트는 정언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문법을 따르지만, 반대로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욕망을 따라가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픈 것>이라는 문법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법이 타락했을 때의 양태는 각각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과 히틀러일 텐데, 먼저 나치스 친위대의 유대인담당 과장이었던 아이히만의 경우엔 총통의 명령을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이면서 반인륜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불사했죠(그렇지만 선의지는 명확한 기준을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반대로 히틀러는 유대인을 말살하고픈 자신의 욕망에 너무도 충실하며 끔찍한 <최종해결책>을 승인했고,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였습니다. 하지만 칸트와 프로이트가 각각 윤리적으로 발현됐을 때—비록 문법은 다르지만—우리는 천안문 광장에 서 있는 탱크맨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동전의 양면 비유가 숨긴 진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비유에서의 핵심은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든 뒷면이 나오든 간에 떨어지는 위치는 같다는 것.

이만 마칩니다. 총총.

※사족(蛇足). 어제 영상 촬영본이 담긴 USB를 잃어버려서 업로드를 못했었네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건지……. 아, 그리고, 오늘 유뷰브 미리보기가 아니라 네이버TV 미리보기를 해놓은 것은 검색 품질을 테스트하기 위함입니다. 보통 제가 게시물을 하나 올리면 700-1000쯤 조회수를 기록하는데, 유튜브 링크를 걸기 시작한 뒤부터 200-300으로 꺾여버리더라고요. 아무래도 네이버에서 유튜브를 견제한다고 유튜브 링크값이 있는 블로그 품질을 낮추는 것 같은데……(일단 3-4회 정도 테스트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김창길, 「맨몸의 남자, 멈춘 조종사…<악의 평범함>을 거부한 평범한 영웅들」(경향신문, 2018.05.2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242052005&code=960100
  2. 임마누엘 칸트·이원봉 역,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책세상, 2005), 26쪽.
  3. 위의 책, 27-28쪽.
  4. 지그문트 프로이트·강영계 역, 『쾌락원리의 저편』(지만지, 2009), 24쪽. 「억압으로 하여금 쾌락의 가능성을 불쾌의 원천으로 변화시키게끔 하는 상세한 과정은 아직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거나 명쾌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확실히 모든 신경증적 불쾌는 그와 같은 종류의 것이며, 쾌락으로서 느껴질 수 없는 쾌락이다.」
  5. 가령 향락(jouissance) 개념을 고찰했던 《세미나》 제7권에서 향락을 즐기는 자학적인 타자의 극단적인 모습이 도드라진다. 사사키 아타루·안척 역, 『야전과 영원』(자음과모음, 2015), 141쪽에서 재인용. 「쾌락원칙의 피안,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의 장,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이 우리에게 판단을 요구하는 몇 가지 종교적 위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폴리뇨의 안젤라(Angela of Foligno)는 나병 환자의 발을 씻은 물을 기꺼이 마십니다만 그때 그녀의 목에 나병 환자의 피부가 걸리고 맙니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복자(福者) 마리 알라코크(Sancta Margarita Maria Burgunda)는 적잖은 영적 은혜 속에서 병자의 배설물을 먹었습니다.」
[원고들] 탱크를 막아서다—칸트와 프로이트의 동전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