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서재라고 부를 방 하나 없는 우리 집에는 옛날부터 책이 참 많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갈색 나무 책장 속에는 아빠의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아빠는 가방 속에 언제나 책 한 권을 가지고 다녔다. 아빠가 읽는 책들은 시시한 자기계발서였다. 10년 모아 1억 만들기, 성공하는 부동산 운영의 비밀, 메모하는 습관이 인생을 바꾼다. 나는 그 뻔한 제목과 제목보다 더 뻔한 내용의 책들이 거슬렸다. 가끔은 짜증이 나기도 했다. 파란색 펜으로 밑줄까지 쳐가며 1억 만들기를 열심히 읽었음에도 우리에게 1억은 없었고, 성공하는 부동산 운영의 비밀을 닳도록 읽었음에도 아빠의 부동산은 오지 않는 손님을 쓸쓸히 기다리다 결국 빚만 남긴 채 문을 닫고 말았으니까. 결과가 언제나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 게 인생이라는 사실 정도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깨달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현실이 미웠다. 밤낮으로 일을 하며 편하게 발 뻗고 잘 시간조차 없이 사는 노력에 비해 결과는 너무나도 작고 초라했다. 그리고 그 결과만큼이나 아빠는 매일 작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를 닮은 나는 책을 좋아했다. 고작 몇 푼 아끼겠다고 다 쓴 로션통을 잘라 벽에 붙은 마지막 내용물까지 박박 긁어 쓰는 주제에 한 권에 밥 두 끼 값을 꿀꺽 잡아먹는 책을 사는 게 좋았다. 딱히 돈 나올 구석이 없었던 시절, 나는 아빠의 책상 위에 있는 책들을 야금야금 헌책방에 팔아 그 돈으로 가지고 싶은 책을 샀다. 아빠의 책은 한 권씩 줄어들었고, 내 책은 점점 늘어갔다.
몇 달에 한 번씩 그런 때가 있다. 갑자기 무슨 책이든 사고 싶어지는 때가. 아빠의 책상에는 더이상 팔만한 책이 없었고, 아르바이트 월급날은 아직 한참이나 남은 날이었다. 문득 베란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평생을 함께 살았지만 제대로 들여다 본 기억이 없는 그 낡은 책장 문을 열었다. 그 속에는 젊은 날의 아빠가 읽었던 책들이 있었다. 그건 소설이었고, 에세이었고, 시였다. 아빠도 그랬다. 아빠에게도 하루키를, 피천득을, 윤동주를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꺼내 펼쳤다. 군데군데 연필로 동그라미를 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시와 소설을 좋아하던 아빠의 책장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던 건 가장의 무게와 책임감 때문이었겠지. 하루하루 그저 살기 바쁜 팍팍한 날들에 문학이란 사치였겠지. 학창시절 학교에서 펜글씨를 제일 멋들어지게 쓰고, 교과서 귀퉁이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소년은 그렇게 어디론가 사라졌겠지. 다른 책을 펼쳤다. 13년 전의 아빠가 13년 전의 엄마에게 선물했던 책의 첫 장에는 짧은 편지가 적혀 있었다.
아빠에게 책 선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책을 고르려면 아마도 한참 서점을 헤매야겠지만. 남들에게는 몇 장씩 빼곡하게 잘도 쓰는 편지를 차마 아빠에게는 쓰지 못해 그 옛날 아빠처럼 짧은 메모 몇 줄만을 남기겠지만. 나는 아빠의 청춘을 훔치며 자랐다. 어쩌면 가장이란 지켜야 할 단 하나를 위해 너무도 많은 것들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아빠의 청춘과 맞바꾼 내가 적어도 딱 그만큼의 가치는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