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을 보았다. 영화 버닝은 '헛간을 태우다'라는 무라카미하루키의
버닝'에 대해서는 꽤 오랫동안 생각하고, 꽤 여러번 뭐든 써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 영화는 마치 무언가를 분석하고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간 감독의 전작을 통해 마주했던 폐부를 찌르는 시선이나 의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먼저 느낄 수 있었던 그 무엇을 버닝에서는 포기하길 강요받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게 이창동의 의도라면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스릴러의 외피를 입은 듯한 이창동의 세계 ‘버닝’이 주목한 대한민국의 보편성은 '젊은이'였다. 그들의 감정으로 공정하지 못한 세상이 안긴 무력감과 분노를 언급한다. 허나 영화는 젊은이를 사용만할 뿐, 그것을 극 전반에 내세우진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차곡차곡 누적되고 결부돼 버닝만의 결말을 향한 도화선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 해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감독은 “의미나 관념, 메시지 대신 감각과 이미지로 느끼길 바랐다.”고 전한다. 그 덕분에 스크린의 미스터리는 세상의 미스터리와 연결됐고 그래서 관객은 답을 얻는 대신 미스터리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버닝은 동시 존재하는 것들의 이야기이자,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진실이 달라지는 이야기가 된다. 관객 역시 자신이 본 만큼만 믿음을 갖게 된다.
밀도 높은 스토리텔링과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통찰에서는 여전히 그의 인장이 선명히 드러나지만, 분명한 건 버닝은 전혀 '이창동스럽지 않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이 내겐 매우 충격적이었다. 8년만에 돌아온 그는 완전히 예상을 깨는 버닝을 던져주며 우리의 편견 역시 태워버린다.
종수의 혼란한 시선은 참과 거짓의 경계를 뒤흔들고, 드러나지 않은 '실체'를 찾아 헤맨다. 허구와 진실을 넘나들며 종수를 통해 바라본 세상은 왜곡되어있다. 그가 확신하는 실체를 그 누구도 진실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이들에게 그토록 냉막했던 현실은, 우리의 현실과는 다른 것인가. 단 한번 불타오른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하는 것일까. 혼란스럽다.
'이제 진실을 얘기해봐'
정해진 답을 찾기보다는 인식의 틀을 현실에서 예술의 차원으로 옮겨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 새로운 시도. 그간 어떤 영화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한적이 있던가. 예술은 정말 이런 것일까. 이 정도에는 도달해야하는 것일까. 아아, 이 역시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