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있었다. 내향적인 성격을 내성적인 것으로 오해받았고 전학을 많이 다녔던 탓에 반 친구 모두 내 친구예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손꼽을 만큼이었지만 우리는 친구였고 그렇게 불리워도 괜찮았다.
친구들과 달라졌다. 서울로 대학을 오며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연락이 끊어졌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학교 때 친구들마저 그렇게 됐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취직, 결혼, 유학, 이민, 그리고 별거 아닌 일들로 커진 오해가 밀어낸 마음을 해결하지 못했던 일들.
친구들은 바빴다. 야근에 격무는 기본이었고 일찍 결혼한 친구들은 온갖 경조사에 살림, 육아까지 해내느라 여념없었다. 그런 세상의 쳇바퀴를 어떻게든 가까이서 바라보고 싶었고, 기왕이면 그 안에 같이 들어가 돌고 싶어 애썼던 시간은 결국 그들과 멀어지는 시간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에겐 속할 수 있는 가정이 있고 믿을 수 있는 배우자가 있다. 아이도 있고 일터도 있다. 어른스러운 모습도 있고 그에 어울리는 아이템도 있다.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기도 했고 가족여행이라는 것도 다녀왔을 거다. 엄마 앞에는 친정이라는 단어가 붙을 것이다.
친구에게 의지하지는 않았지만 혼자 많은 것을 해야 하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혼자가 편하지만 때론 쓸쓸하다. 씩씩해야 덜 무시당하지 싶어 이악물고 땍땍거리지만 돌아서면 온몸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난다. 혼자 뽈뽈거리지만 찬란한 봄에도 더운 여름에도 근사한 가을에도 추운 겨울에도, 혼자라는 건 여전히 적응해야 하는 일이다.
옆에 누가 있으면 잠을 설치지만 가끔은 기대고 싶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피드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 아프게 눈물도 난다. 팝콘콤보 한가득 품에 안고 영화보러 가는 모습이 부럽다. 서점에서 좋아하는 책을 한 권 살지 두 권 살지 고민하며 투탁거리고 싶기도 하다.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 쌉싸름한 맥주 마시며 파도소리를 듣고도 싶다.
그리고 올해. 랜선 너머, 모니터 뒤에, 메신저 프로그램에 있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들이 반기지 않는 월요일, 격무와 스트레스를 한보따리 갖다주는 손님 같은 날. 불안정한 혼자 모드가 뻐근하게 익숙한 나는 티비 소리를 배경삼아 일을 하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백수의 여유인가, 감정의 사치인가. 찬란해지는 봄만큼 센티멘털해지는 것은 30대의 주책인가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해볼까, 그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