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에세이] 마음이 분주한 요즘

agood(55)
Published in
#kr
Words
340
Reading
2 min
Listen
Play
8y

몸을 잔뜩 움츠릴 수 밖에 없던 오늘.

장을 보러 간다는 친구들 말에 '어머 이건 가야해' 한마디를 던지고는

코스트코에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카트 요리조리 밀며, 익숙한 재료들을 집어들었다.

맥주 더미와 와인 더미를 지나며,

가족들이 생각났지만 홀로 마실 생각을 하니

그닥 설레이지 않아 카트에 담지 않았다.

심심한 마음으로 장을 보다가 아보카도 더미를 보니 언니 음식들이 떠올랐다.

조금 말랑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먹을 생각으로 카트 한켠에 내려놓았다.


캡처.JPG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과 가사없는 음악으로 몸을 녹였다.

아침에 이유없이, 친구에게 보내었던 노래였다.

눈을 떠보니 일요일이길래, 그냥 생각나서. 라는 실없는 핑계와 함께.

<일요일 출근길>이라니, 묵묵히 일어나 어른 행색을 할 친구가 대견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나같은 애는 어림도 없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노래가 두어번이고 반복재생되고 나서야 장본것들을 정리해넣을 수 있었다.

아보카도, 치즈, 나초칩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1.jpg

둥그란 모습이 먹음직스런 베이글은 아침마다 먹기 좋게 미리 자르기로 했다.

베이글을 반으로 자르다 어제 책에서 본 도넛이 어쩌구.. 하는 구절이 떠올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두어번이나 곱씹었던 문장이었다.

나는 도넛으로 태어났다.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렇게 우리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는, 도넛과 같은 존재니까.

딱히 그 문장이 좋아서 내 기분이 좋아졌던 건 아니었다.
어제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었고, 오늘은 장을 봤다.
가족들과의 시간들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혼자서도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었다.
보고싶은 친구가 생겼다는 건
마음에 어떤 채울 만한 공간도 생겼기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던 터였다.

넘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았다.
고만고만한 하루의 끝에, 어제 마음에 담은 문장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 나는 오늘같은 삶이라면 충분하겠구나.

<이런 하루..>, 그래 나 이런 하루가 무척이나 살고 싶었었지.
하는 생각에, 누군가에겐 시시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게 하찮지만은 않았다.
종일 시시할 뿐, 나는 앞으로도 다른 날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언제부터 기다려온 날들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베이글을 반으로 자르다가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단어가, 문장이 부족한 나는 또 '행복하다'는 단어의 대체어를 찾지 못해
멍청하게 몇분을 또 흘러보내며 아쉬워할 뿐일지라도.

요즘의 나는 종일 이렇다할 일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녁만 되면 노곤함을 느낀다.
몸 편히 잘 쉬고 있음에도, 하루는 훌쩍 또 훌쩍 지나간다.

아마도 마음이, 그래 마음이 꽤나 분주한가 싶다.
몸이든 마음이든 둘 중 한놈은 바빠야 안심을 하는 나로서는,
이런 날을 살고 싶었던거구나 드디어 알아차렸다.

적당한 피로가 있는 하루에, 감사할 수 있도록 나를 길들여온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