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먼저 접했고 소설이 뒤따랐으나,
'기린이 아닌 모든 것'부터 접했던 게 화근이었던 걸까.
소설로 선회할 뻔했던 마음은 시로 되돌아왔다.
그러다 파주에서 열렸던 민음패밀리데이 때 표지에 반해 들었던 책이, 하필 이장욱의 소설이었다.
다시 소설을 읽어야 할 타이밍이 지금인 걸까.
아직도 썩 편치 않은 부산 집에 다녀오면서 꽤 많이 피곤했지만,
어쩐지 읽고 싶었다.
그냥이나 어쩐지 같은 말밖에 꺼낼 수 없는 마음은 대개 진짜일 때가 있다.
이번에도 그랬던 것 같다. 부산역을 출발하면서 펼쳤던 책은
서울역을 목전에 둔 한강철교를 지나면서 덮었고,
펜도 플래그도 없어서 아이폰 메모장에 빼곡하게 쓴 페이지 숫자들은
차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맞춰 넘실거렸다.
미묘한 엇갈림, 찰나의 비껴남.
작가는 이런 것들을 알아내어 표현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살면서 제법 많이 느끼지만 글자로 만들 틈까지는 허락치 않는 그런 균열,
사소한 일인 줄 알았는데 약간의 시간과 적당한 거리만 있으면
얼마든지 금세 사소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일들이 적확하게 담겨 있는 문장들이 아프고 놀라웠다.
작가는 밝음을 아주 깊은 곳에 숨겨놓는 특기가 있는 것 같다.
언뜻 읽으면 어둑한 단어가 한가득 쏟아지지만,
여러 번 읽으면 겨자씨만큼씩 알게 된다,
'어둡지 않음'을. 하지만 굳이 그걸 모르더라도 서운해하진 않아도 될 것 같다.
담담하지만 살짝 비틀린, 솔직하지만 식지 않은,
담백하지만 공허하지 않은 느낌이 글들에 진하게 배어나니까.
다시,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속해 있는 세계가 뾰족한 공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평행 우주의 다른 세계로 스며들고 싶었다.
그런 우주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 때문에,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지푸라기나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하지만 문장 속에서도 나는 자주 비관에 멱살이 잡혀 질질 끌려다니곤 했다.
나에게 비관이라는 것은 어떤 정서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물리적인 힘의 이름에 가깝다.
내 멱살을 휘어잡고 패대기 치는 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