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가을 같은 울림을 남기고 가을에 떠났다. 오는 19일은 당대의 여류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의 31주기다. 그의 비극적인 삶과 별개로 그의 음악을 들어주시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가 연주한 엘가 첼로 협주곡을 맨 위로 올렸다.
뒤 프레는 1945년에 태어나 1987년에 돌아갔다.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첼리스트였다. 5세에 첼로를 잡았다. 윌리엄 플리스, 바블로 카잘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를 사사했다. 1961년 데뷔했고, 1965년 5월 미국 카네기홀에서 역사적인 엘가 협주 첼로 협주곡(작품번호 85)을 녹음했다. 그렇다. 지금 나오는 이 곡이다.
엘가 첼로 협주곡이 곧 뒤 프레였고, 뒤 프레가 곧 엘가 첼로 협주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뒤 프레가 연주하기 전까지 이 곡은 대중이 사랑하는 곡은 아니었다. 그가 연주하고 녹음한 뒤 대중은 엘가 첼로 협주곡은 대중이 사랑하는 곡이 됐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오늘날 엘가 첼로 협주곡은 손에 꼽는 클래식 첼로 협주곡 레퍼토리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뒤 프레를 “나와 동등해지거나, 나를 능가할 다음 세대의 유일한 첼리스트”라 평했다. 한 음악평론가는 “로스트로포비치가 순수한 힘이라면, 뒤 프레는 첼로 위의 폭풍우 같다. 밝고 명랑한 동시에 열정적”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뒤 프레의 연주는 우아함과 맹렬함을 혼합했다. 힘이 있다. 굉장한 크기로, 감미로를 소리를 낸다. 그는 첼로를 연주하려고 태어났다”고 썼다.
뒤 프레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났다. 둘은 뜨겁게 사랑했다. 이듬해 6월, 뒤 프레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갔다. 기독교도였던 뒤 프레는 유대교로 개종하고 바렌보임과 결혼했다.
뒤 프레와 바렌보임의 협연은 대부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 다른 음악평론가는 “그들은 지리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정반대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성격이 매우 비슷했다. 둘은 격렬한 성관계를 맺었다. 그것이 음악에 반영됐다고 본다”고 했다.
나는 뒤 프레가 바렌보임과 남긴 녹음을 듣지 않는다.
빛나는 시간은 왜 그리 짧은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뒤 프레는 1971년 팔을 움직이지 못하는 등 이상 증세를 호소했다. 갑자기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시력이 나빠져 악보를 볼 수 없었다. 당연히, 연주 기량은 떨어졌다.
난치병 다발성 경화증이었다. 뒤 프레가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이유는 불분명하다. 본디 그런 병이다. 재클린 뒤 프레의 동생, 플루티스트 힐러리 뒤 프레는 언니가 바렌보임과의 불화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주장했다. 힐러리에 따르면 증상이 나타나기 2년 전부터 뒤 프레는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으로 진정제를 투약했다. 바렌보임은 뒤 프레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뒤 프레는 결국 은퇴했다. 1973년, 그의 나이 28세였다. 병마는 뒤 프레의 척수신경을 갉아먹었다. 1975년 뒤 프레는 거동할 수 없게 됐다. 안면 신경도 손상됐다. 얼굴을 움직이지도,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다. 겨우 스프만 삼켰다. 뒤 프레는 1987년 사망했다. 42세였다.
바렌보임은 뒤 프레 사망 30주기였던 지난해 10월 영국 런던에서 추모 공연을 했다. 그때 바렌보임은 “뒤 프레와 연주하는 것은 내 음악의 최고 즐거움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완해 완성했다. 그녀에게는 전염성 강한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사랑했다”고 말했다.
뒤 프레 생전, 그러니까 뒤 프레가 자신을 박제하는 다발성 경화증과 싸우는 동안 바렌보임은 다른 여자, 러시아 출신 유대인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와 동거했다. 뒤 프레는 그것을 알고도 용인했다. 아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바렌보임은 바쉬키로바와 동거하면서 두 아이를 낳았다. 아직 뒤 프레가 살아있을 때였다.
나는 바렌보임의 연주를 듣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