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퇴근해서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홀짝이고 있어요. 오늘의 술은 시바스 리갈 18년입니다. 시바스 리갈 18년은 아주 깊고 달아서 좋아해요. 몸과 마음이 지친 날 시바스 리갈 18년을 마시면 좀 위로가 돼요. 더 쓰면 술스팀이 될 테니까, 목요일을 위해 남겨둬야겠습니다.
집에 오는 길 인도 안전 펜스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는 걸 봤어요. 철제 펜스가 구겨진 정도와 길의 생김을 종합했을 때, 술에 취한 운전자가 들이받은 게 확실했어요. 저는 음주운전을 혐오합니다. 죽을 거면 자기나 죽을 것이지, 음주운전은 다른 사람까지 죽이는 거잖아요.
쯧, 혀를 차다가, 아 술에 취한 자가 운전하는 차에 치여 비명횡사하는 게 나일 수도 있겠구나 했어요. 그 길은 제가 늘 다니는 길이거든요. 가끔 제가 술에 취해 휘청대면서 걸어가는 길이기도 하죠. 그런 생각을 하니까 서늘해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고요.
몇번 쓴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종종 저는 인생이 와인잔 같다고 느껴요. 되게 예쁘고 반짝이는데, 작은 충격에 산산조각이 나버리곤 하는. 초등학교 4학년일 때부터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거든요. 그때부터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고 해서. 금방 또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그래서인가 봐요.
엊그제는 집에서 와인을 먹다가 아끼는 와인잔을 깨먹었어요. 2016년에 산 거니까, 뭐 그 정도면 오래 버텼다 싶다가도, 덩그러니 하나 남은 잔을 보면 또 속상해요. 큰 튤립처럼 생긴 와인잔이었거든요. 예뻤어요. 거실 바닥에 놓고 있었는데. 제가 툭 치니까 모로 쓰러져 깨져버렸어요.
좀 힘든 날 더 갬성이 충만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제 업무의 팔할은 우리 도날드 도람푸 미국 대통령 선생 덕분이에요. 북·미 정상회담 한다고 했다가, 안 한다고 했다가, 다시 또 한다고 하고. 야 이 자식아.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한테 따봉 할 땐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주절주절 쓰고 남은 술 더 먹고 샤워하고 자면 좋겠지만, 신에게는 아직 열여덟 장의 기사가 남아있습니다. 회사 사정상 내일 오전 중에 출고해야 하는 기사입니다. 뼈대는 잡았으니 두 시간 안에 마무리하고 잘 생각이에요. 이 잔을 다 비우면 불란서에서 온 보드카를 마실 겁니다.
와인잔을 하나 새로 사야겠어요. 주석으로 만든 와인잔을 사려고요. 좀 덜 예뻐도, 깨지지 않으니까. 제 아들들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저와 달랐으면 좋겠어요. 어디 사는 게 다 좋을 수만 있겠느냐마는. 잠에서 깬 둘째가 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