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화장한 날은 너무 추웠다. 화장터에서 나는 몸을 벌벌 떨면서 울었다. 추워서 떨었는지, 엄마가 불쌍해서 떨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어머니는 반평생 아팠다. 너무 아파서, 자살하는 사람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어머니는 생전에 말씀하셨었다. 어머니의 육신이 회색 가루가 되어 함에 담겼다. 저것은 내 엄마가 아니다. 내 엄마는 이제 영영 사라졌고, 이땅에는 엄마를 구성했던 무기물만 남은 것이다.
둘째 돌잔치를 하는 날 서울의 온도는 섭씨 30도 후반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났다. 우리 네 가족은 한복을 입었다. 한복을 입고 야외에서 돌사진을 찍었다. 신록이 푸르렀다. 매미가 우렁차게 울었다. 사진작가는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를 여기에 세우고 사진을 찍고, 저기에 세웠고, 계단을 오르게 했고, 계단을 내려가게 했다. 큰놈이 덥다고 짜증을 냈다. 나는 짜증 내는 큰놈을 다그치지 않았다.
조촐한 잔치였다. 첫째도 아닌 둘째의 돌이었으므로, 우리는 양가 친지 외에는 초대하지 않았다. 돌잡이를 하기 전에 가족사진을 찍었다. “친가 쪽 나오세요”라고 사진작가가 말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외아들이다. 내 아버지 말고는 나올 친가 쪽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와 아내 사이에 섰다. 아내는 작은놈을 아버지 쪽으로, 나는 큰놈을 아버지 쪽으로 안고 찍었다. 사진이 좀 휑하겠구나, 생각했다.
아내는 2녀 1남 중 둘째다. 사진작가가 처가 쪽을 호명했다. 장인어른, 장모님, 처형 내외, 처형의 딸, 처남이 돌상 뒤에 자리를 잡았다. 작가가 “조금 더 붙어서 찍을게요. 다닥다닥 서 주세요”라고 했다. 처가 쪽 사진은 꽉 차게 나오겠구나, 생각했다. 아버지는 사진작가 옆에 서 계셨다. 거기 서서 아들과 손주들과 며늘아기와 사돈댁이 사진 찍는 광경을 보고 계셨다. 문득 혼자 된 아버지가 가여웠다. 그래도 나는 웃는 얼굴로 사진 찍혔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속눈썹이 긴 큰놈을, 이마의 선까지 나를 빼닮은 작은놈을 보면 얼마나 예뻐할까, 생각했다. 안 그래도 예쁜 놈들인데 잔칫날이라고 한복을 입혀놓으니 더 예뻤다. 그래서 더 슬펐다. 식사 도중 장모님은 장인어른께 농 섞인 핀잔을 하셨다. 그게 참 정겨워 보였다. 아버지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그러다가 큰놈 먹을 과자를 잔뜩 담아가지고 오셨다. 아직 밥도 제대로 안 먹였는데.
돌잔치 일주일 전 나만 따로 시내에서 아버지를 뵈었었다. 그때 아버지는 나와 맥주를 드시다 말고 “엄마 아프고, 사업 그렇게 되고 한 게 다 꿈 같아”라고 하셨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아버지와 잔을 부딪쳤다. 잔칫날 혼자 계신 아버지를 곁눈질하다가,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했다. 내 생각과 달리 아버지는 혼자서 잘 지내시는 것이다. 조금 외롭지만,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지내시는 것이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