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오더쿠스] 2. 푸닥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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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제 피곤하겠다. 양선생한테 찍히면 괴로울 텐데.”

박하나가 빨대 꽂은 바나나우유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반에서 1~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다. 실력 좋은 박하나는 나와 달리 선생님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나는 1학년 때 그녀와 같은 반이었다. 그리고 한때는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몇 번 추근거리기도 했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생각만큼 잘 풀린 건 아니다.

나는 그녀로부터 독사눈의 학원 강사가 바로 양선생이라는 사실을 처음 들었다. 양선생은 첫 수업 때 자기소개를 하지 않는다. 보통은 개강하고 1주일쯤 지나서야 자기소개를 하는데 그건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주일을 못 견디고 학원을 그만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놈 웃기지?”

박하나가 물었다.

“누구?”

“너희 반에 그 뚱뚱한 애 있잖아. 허세부리면서 헛소리 하는 애.”

“김웅섭?”

내가 되묻자 하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 생각만 하면 아직도 속에서 천불이 난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지그시 감고는 그 놈의 말도 안 되는 논리와 의기양양한 표정을 떠올렸다. 꽉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렇잖아도 그놈 때문에 양선생이랑 면담했다. 앞으로 수업 끝나면 보충수업 한 시간 더 듣고 가래.”

“나는 걔를 잘 알아.”

“어떤 놈인데?”

“오타쿠.”

“그 정도는 나도 알겠다. 딱 봐도 그렇게 생겼는데.”

“그리고 걔는 자기 주관을 드러내는 걸 엄청 좋아해.”

“장난하냐? 누가 봐도 그렇구먼.”

나는 다 먹은 바나나우유 팩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녀의 맥 빠지는 소리에 와락 짜증이 났다. 뭐 대단한 비밀이라도 나올 줄 알았건만. 박하나는 아직 절반도 채 못 마신 바나나우유를 홀짝거리고 있다. 우유 마시는 속도보다 빨대가 닳아 없어지는 속도가 더 빠를 것 같다. 여자들은 음료수를 왜 그렇게 천천히 마실까? 핥아 먹어도 그보다는 빠를텐데. 박하나가 말했다.

“그 허세도 오래가진 않을 거야. 좀 더 나이가 들면 걔도 좀 과묵해지겠지.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말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김웅섭의 말도 안 되게 당당한 태도를 떠올렸다. 살을 빼면 뺐지, 그 근거 없는 오만함만큼은 환갑이 넘어서도 고쳐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더구나 고등학교 2학년 여자애가 한 사람의 미래를 단정 지으며 논평하는 것도 어쩐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하나는 대수롭지 않은 추론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 들어 보이며 말했다.

“네 말대로 딱 보면 알겠다. 너, 저기 놀이터에 꼬마들 보이지?”

박하나의 돌발질문에 나는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놀이터로 시선을 옮겼다. 열 댓 명의 아이들이 연보라색 보도블록을 깔아놓은 공터에서 축구공을 차고 있었다. 구입한지 얼마 안 된 공에선 반질반질한 윤기가 흐르고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한 번 박하나가 물었다.

“친구들은 다들 축구를 하고 있어. 그런데 거기엔 끼지 못하고 혼자 모래장난만 치고 있는 애가 있다면,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할 것 같니?”

“모래장난 치는 애는 없는데?”

“그냥 예를 든 거지 바보야. 상상을 해봐. 걔는 분명 자기가 지은 모래성을 자랑하고 싶을 거라고.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다가와주길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는 축구 따위엔 관심 없다. 그러니 다들 이 모래성을 보아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게 사실은 외롭고 소심해서 그러는 거야. 불쌍하지 않니? 자기는 축구에 흥미도, 재능도 없는데 사람들은 다들 축구만 한다는 게. 그러니 걔 입장에선 이제 축구 같은 건 다들 그만뒀으면 싶을 거야. 그런데 만약 아무도 그 모래장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다들 못 본 척 축구만 계속한다면?”

“아마 기가 죽겠지?”

“사람들은 그래서 과묵해지는 거야.”

박하나가 말을 마치자 수업시작 종이 울렸다. 그녀는 먹다 남은 바나나우유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총총걸음으로 뛰어갔다. 나는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박하나는 이미 강의실로 들어간 뒤였다.

그날 저녁 보충수업 시간에 나는 김웅섭과 나란히 앉아 오늘 풀었던 수학 문제를 다시 풀어야했다. 찬찬히 살펴보니 그렇게까지 어려운 문제들은 아니었다. 처음 당황했던 건 문제가 어려울 것 같다고 지레 겁을 먹은 탓도 있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꼼꼼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김웅섭도 옆에서 뭔가를 꼼지락거리는 듯 했다. 문제풀이가 끝난 뒤엔 답안지에 맞춰 채점을 해 보았다. 56점. 아마 김웅섭의 답안을 베끼지 않고 내가 직접 풀었다면 아까처럼 수모를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이 보충 수업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겠지.

‘이게 다 김웅섭, 저 놈 때문이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김웅섭을 째려보았다. 녀석은 아까부터 구부정하게 앉아서 요란스레 수선을 떨고 있었다. 어디 얼마나 잘하고 있나 보자 싶어 슬쩍 넘겨보니 김웅섭의 시험지는 여전히 백지였다. 그를 바라보니 김웅섭은 문제를 풀기는커녕 핸드폰으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양선생의 강의실에서 핸드폰을 만진다는 건 주유소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행위와 다를 게 없다.

‘이러다가 나까지 싸잡아 욕먹으면 어쩌지?’

안절부절못하는 나와는 달리 김웅섭은 태연했다. 자세히 보니 김웅섭이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 그건 정지된 만화 캐릭터와 대사로만 진행되는 일종의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자기 키만 한 양날 검과 방패를 든 금발의 미소녀 캐릭터가 녀석의 스마트 폰 화면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흘끔 보니깐 야한 그림도 몇 개 나오는 것 같던데. 게임 속 대사는 전부 일본어였고, 자막은 화면을 삐져나올 만큼 길었다. 내 시선을 의식한 김웅섭이 게임을 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 혹시 페이트에 관심 있냐?”

“그게 뭔데?”

“페이트. 세이버.”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김웅섭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고등학생씩이나 되서 페이트 세이버를 모르냐? 넌 인생에 대해 아는 게 없구나.”

김웅섭의 말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김웅섭이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핸드폰을 들이밀며 물었다.

“이게 뭐 같냐?”

화면에서는 프릴이 잔뜩 달린 푸른 드레스 위에 갑옷을 입은 미소녀 캐릭터가 뭔가 알 수 없는 대사를 치고 있었다. 대사는 물론 일본어였는데, 제 2외국어로 독어를 선택한 나로서는 읽을 방법이 없었다. 내 답변을 기다리는 김웅섭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는 부담스러운 그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모르겠는데?”

“지금 에미야 시로가 나더러 사랑한다고 하고 있잖아.”

“그래서?”

“그래서라니. 넌 여자 때문에 울어본 적이나 있냐?”

김웅섭이 던진 질문에 나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고1때 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좀 찌질하게 울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 추억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치욕을 친하지도 않은 안여돼에게 까발릴 생각은 없었다.

“어...... 없는데.”

내 말을 들은 김웅섭은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네가 사랑에 대해 뭘 알겠냐.”

“야, 그건 그냥 게임이잖아?”

녀석의 어처구니없는 태도에 발끈한 내가 쏘아붙였다. 그러자 김웅섭은 전보다 더 강렬하게 내 눈을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어........ 게임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인가?”

“이건 말이야 친구, 문학이자 인생이야. 너에게도 지성이라는 게 있다면 몇 달 뒤엔 내 말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논해보자고.”

김웅섭은 다시 핸드폰 화면에 고개를 처박았다. 나는 순간 진짜로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할 말을 잃고 멍청히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때 양선생이 돌아왔다. 말끔한 정장은 간 데 없고 무릎이 다 늘어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몸에 짝 달라붙는 양선생의 티셔츠를 보니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양선생은 10여 년 간 고시촌을 전전하다 논술학원 선생이 된 우리 삼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울룩불룩한 양선생의 근육질 육체는 선생님보다는 군인이나 운동선수에게 훨씬 잘 어울렸다. 쫄쫄이 티셔츠 위로 넓고 탄탄한 가슴근육이 불거져 있었다. 불쑥 솟은 어깨와 터질 듯한 알통은 바라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들었다. 중년의 나이에 저런 몸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평생 단 한순간도 저런 몸을 가져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문제 다 풀었냐?”

“아까 다 풀지 않았습니까?”

양선생의 물음에 김웅섭은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양선생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불룩거렸다.

“뭘 풀어? 니가 뭘 풀었는데?”

“말씀드렸잖아요. 전 과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문제 다시 안 풀었어? 그럼 지금 한 시간 동안 여기서 뭘 한 거야!”

“한 시간 동안 전 제 삶에 보탬이 되는 의미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게 뭔데!”

양선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웅섭은 양선생에게 자신의 스마트 폰을 보여주었다.

“페이트입니다. 인생이자 문학을.......”

“야 이 개새끼야!”

양선생은 김웅섭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주먹으로 김웅섭을 때리기 시작했다. 요행히 급소는 피해서 치는 것 같았지만 학원 선생이 휘두를 폭력으로선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를 맞는 김웅섭은 의연한 태도로 양선생을 노려보다가, 매질이 두 대를 넘어가자 바닥에 엎어져 본능적인 방어 자세를 취했다. 소란 통에 김웅섭이 들고 있던 스마트 폰도 바닥에 떨어졌다. 5.5인치 화면 속에서 비키니를 입은 미소녀가 알 수 없는 일본어를 외치고 있었다.

“야메떼! 야메떼!”

다음 날부터 김웅섭은 거짓말처럼 고분고분해졌다. 양선생의 주먹은 소문대로 무시무시했다. 쇠심줄 같던 김웅섭이 고집을 꺾고 드디어 학원에서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모르긴 해도 양선생의 주먹이 꽤나 아팠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