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이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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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쁨'에도 종류가 있다. 마음만 바쁠 때도 있고, 해야 할 일이 많을 때도 있고,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할 때도 있다. 나는 요즘 가야 할 곳이 많았고, 그래서 해야 할 일이 계속 밀리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은 자꾸 어지러워지고, 물리적 시간이 부족한 '바쁨'을 겪었다.

그렇게 바쁠 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바쁘게 된 건 그런 와중 일상 속 여유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는 짬에 일을 해야 했는데,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지금도 할 일 산더미인데, 카페에 와서 스팀잇에 글을 쓴다.

이 정도로 바빠지면 늘 그렇듯 고질병인 체력 부족이 따라온다. 뙤약볕에 하도 돌아다녔더니 더위에 잠식당해버렸다. 요 며칠부터 삼계탕 한 그릇이 간절했다.


2

최근 자연별곡에 갔다. 삼계탕이 있다고 좋아했는데, 닭이 영 부실했다. 먹고 나니 더 삼계탕 생각이 났다. 갓 잡은 토종닭에 각종 약재를 넣고 푹 고아낸, 그런 삼계탕이 먹고 싶어졌다. 그리고선 그게 얼마나 야만적인 생각인지 깨닫게 되었다.


며칠 전 아는 어른의 가게에 갔다가 우연히 개고기를 보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적 개고기를 먹은 기억이 있다. 그때는 어떤 음식인지도 모르고 먹었고, 그 이후로는 먹을 일이 없어 안 먹게 되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마주한 개고기는 충격적이었다. 나와 같이 있던 지인은 "저도 좋아하지만, 우리 세대에선 바뀌어야죠."라고 거절했다.

그날 밤 우리는 소고기를 먹었다. 개고기와 소고기 사이엔 어떤 다른 점이 있는 걸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폴 매카트니는 채식주의자다. 육식을 멈춰달라는 그의 영상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그의 음악을 사랑하면서도 탐욕스럽게 고기를 찾는 내가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내 몸에 필요 이상으로 붙어있는 지방들이 그 증거다.

어떤 방향인진 모르겠지만, 지인의 말처럼 '우리 세대'에선 뭔가가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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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근 음악과 관련된 곳에 서류를 처리하러 갈 일이 있었다. 관계자를 기다리는데 합주실에선 합주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팀이 만든 곡을 들으면서 이런 유치한 생각을 했다.

내가 더 잘 만들 수 있는데

괜한 심통에 그 자리에 앉아 수첩에 오선을 그렸다. 곡을 쓰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그 팀보다 나은 곡'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음악은 거기서 만들어지고 있었으니 나는 그들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음악 전공자를 새로 알게 되었다. 음악을 하겠다고 정하고도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 태도에, 음악을 가볍게 생각하는 그 모습에 화가 났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이상할 정도의 과한 언짢음이었다. 불콰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나의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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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늘은 아침 합주가 있었다. 어떤 팀에게서 곡을 의뢰받았는데, 오늘이 그 첫 합주 날이었다. 시작은 9시였다. 아마도 그 시간은 저녁에 움직이지 않는 나를 배려하다 정해진 시간일 것이다. 또 나를 위해 내 집과 가까운 합주실을 잡아주었다. 그러고도, 나는 10시 30분까지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사람들의 화장기 엷은 얼굴을 보면서, 퉁퉁 부은 손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소중히 해야 할 것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사소하지 않은 배려를 특권으로 느끼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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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곡은 별로지만, 오랜만에 합주하니 재밌었다. 내가 생각할 때 이 곡은 -3422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오늘 합주를 해보니 내 생각보다는 사운드가 괜찮아서 -1203점으로 급격히 점수를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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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께 직접 만든 옷을 선물 받게 되었다. 나를 위해 만든 옷도 아닌데, 나를 위해 만든 것처럼 딱 맞았다. 평소에도 이런 옷을 무척 좋아하는데, 입어보니 아직 이 옷을 소화하기엔 좀 어리다. 잘 보관해두고 이 옷에 어울리게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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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선물이 도착했다. 요즘 하도 정신이 없어 택배를 받고서도 '내게 올 택배가 없는데?' 하며 의아해했다. 상자에 붙은 스티커를 보고 알게 되었다.

스팀시티(stimcity@stimcity) 굿즈 안에는 라라(roundyround@roundyround)님의 편지가 있었다. 사랑스러운 라라님은 정신없어 보이는 필체로 글을 잔뜩 쓰시고는, 택배엔 자신의 이름에, 주소에, 번호까지 남기셨다. 나는 또 모른 체 하고선 답장을 보냈다.

지금은 할 일을 미뤄놓고, 정신없는 집을 내버려 두고 가까운 스타벅스에 와서 글을 쓰고 있다. 오프라인에선 요리조리 도망 다니느라 바쁜 나지만, 스타벅스에서 이 텀블러에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면, 말을 걸어주면 좋겠다. 지금 좀 추레하지만,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

더위 이겨내기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