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26 나루 작업 일지] 왜?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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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일기를 장렬히 끝내놓고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뭐 하고 지내는지 궁금한 분이 있을 것 같아 글을 써봅니다.

원래 개인 작업을 할 때는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제 곡보다는 글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기대도 부담스럽고요. (그래서 저는 공연이 있어도 알리지 않거나, 아무도 오지 못하게 공연 2시간 전에 뜬금없이 포스터를 올리곤 합니다)

그런데도, 스팀잇에 있는 몇몇 분들이 소식을 궁금해 해주셔서 가벼운 마음으로 작업 일지를 적습니다.


최근 집중하고 있는 작업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무용 작품인데요. 6월 말에 대학로에 올릴 예정입니다. 어쩌다 보니 제가 쓴 시나리오로 작품을 하게 돼, 제가 연출이 되었습니다.


무용 작업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한 외부 작품이 제 첫 번째 무용 작업이었어요. 그때는 무용수와의 호흡보다는, 연주자들끼리 합을 맞추는 것에 더 급급했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 동안 계속 곡이 연주돼야 했고, 연주자도 10명에 달했거든요.

그때는 곡을 쓰고, 그 곡을 합주를 통해 만들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막상 결과물을 보니 만족스러웠습니다. 무용수의 움직임이 더해지니 제 부족한 곡도 참 예쁘게 들리더라고요. 그때 무용이라는 장르에 처음 매력을 느꼈어요. 그 이후로 무용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제가 하는 작품은 전적으로 무용수와의 호흡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보다 과정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좋은 결과물을 위해서지만요) 제게는 음악 형식도, 작업 방식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형태입니다.


제가 쓴 작품이고, 안무를 하려면 음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구체적 계획도 없으면서 다음 만남까지 곡을 만들어오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제 부담감이 느껴졌는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일단 같이 움직여 보죠!"

생각해보면 음악가라는 직업만큼 움직이지 않는 직업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연습을 한다고 몇 시간이고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게 되지요. 곡을 쓸 때도 항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 때문에 움직인다는 표현이 참 낯설었어요. 그래서 일단 움직여보자는 말이 새롭고,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즐거운 자극이 되었어요. 그래서 요즘은 많이 움직여보며 이것저것 만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하면서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왜?"라는 질문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명목상이지만, 제가 연출이 되었기 때문에 다들 끊임없이 제게 묻습니다. "왜?", "왜 내가 거기 서 있어야 해?"

저는 곡을 쓰기 때문에 저에게 "왜?"라고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연주자들은 제가 쓴 곡을 연주할 뿐이지요. 저 역시도 그들에게 "왜 그 부분에서 그렇게 연주해?"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냥 잘 만들어진 레퍼런스 곡을 주면서 비슷하게 연주해달라고 말하지요.

무용수는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그러면 전 이렇게 대답합니다. "잠깐만요. 생각 좀 해볼게요." 그리고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동안 그들도 함께 고민합니다. 저희는 한 번 만날 때마다 적어도 6시간 정도는 함께하는데, 그중의 반 이상을 '이 작품 안에서 왜 이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만 보내게 됩니다.

이런 작업을 진작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음악에는 기술적 흉내만 있고, "왜?"라는 질문이 결여돼있다는 것을, 요즘에서야 느끼게 됩니다. 좀 더 집요하게 파고들지 못했기에 늘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끝없이 질문하고, 서로 대답하고, 충돌하고,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왜?"라는 질문의 답이 명확해지면 기술적인 측면은 저절로 해결되더라고요.

가끔은 '왜?'라는 의미 부여에 너무 깊게 빠져 이상한 방향으로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몇 시간 공들여 짠 안무와 음악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평상시 저라면 "별로 안 이상한데 그냥 해요."라고 했을 텐데 요즘은 몇 번을 버리고 다시 만들어도 즐거운 마음이 듭니다. 저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에 대한 태도를 다시 배우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앞서 말했듯 제 글이 제 음악보다는 낫기에, 이 글보다 제가 만든 작품이 더 나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작품은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보려고 애쓰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네요.

평상시 저였다면 못했을 작업입니다. 일을 그만두면서 시간적, 정서적으로 여유가 생겼기에 할 수 있었습니다. 바쁜 시기에 이 작업을 했다면, 아마 "별로 안 이상한데 그냥 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일상에 공백이 늘어나니, 가끔씩 채워지는 이런 일들이 더 재밌고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어쩌다 보니 무용 작품에 대한 글이 길어져, 또 다른 작업은 다음에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작업이 많지 않기에 바쁜 척 해보는 것이지요.

또, 새로운 앨범도 조심스럽게 고민해보고 있습니다. 가끔 스팀잇에 있는 분들로 라인업을 짜보는데 그 상상이 참 즐겁습니다. (아직까진 공상에 가깝지만요) 크레딧에 ab7b13@ab7b13으로 올라가는 생각을 종종 해봅니다.

한 번도 이런 식의 작업 일지를 써본 적 없는데, 작업 일지라기보단 작업 일기에 더 가깝네요. 작품이 끝나고 몇 년 뒤 이 글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다정한 마음으로 읽어주시는 이웃분들. 저는 몇 개의 작업을 하고 있고, 그래서 무척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답니다:) 늘 감사합니다!

[180526 나루 작업 일지] 왜? 왜? 왜?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