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테세우스 (9-끝)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테세우스 (9-끝)

권력도 명예도 모두 잃은 테세우스는 스키로스 섬으로 건너갔다. 스키로스는 주민들이 그에게 우호적이었을 뿐더러 테세우스의 선조들이 남긴 땅도 있었다. 권토중래를 모색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그런데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기 마련이고, 테세우스가 몰락했다는 소식은 이미 스키로스 섬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스키로스의 왕인 뤼코메데스는 줄서기를 강요당하는 입장에 놓였고, 그는 아테네의 새로운 통치자인 메네스테우스에게 잘 보이는 편을 선택했던 듯싶다. 뤼코메데스는 선조들의 영지를 구경시켜주겠다면서 테세우스를 섬의 높은 곳으로 유인한 다음 그를 절벽 아래로 밀어뜨려 살해했다. 테세우스가 산책 중에 실족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이러한 설명을 소수 의견으로 평가해놓았다.

얼마 후 아테네에는 왕정이 부활하면서 메네스테우스가 왕위에 올랐다. 졸지에 역적의 자식이 돼버린 테세우스의 두 아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일리온으로 원정을 떠났다. 메네스테우스가 죽자마자 권력은 테세우스의 두 아들에게 돌아갔다. 훗날 마라톤 전투에서 테세우스의 유령이 페르시아 군대를 향해 돌격하는 초자연적 현상이 목격되었고, 이를 계기로 테세우스는 아테네에서 반신으로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유해를 수습해 성대히 장례를 치르라는 신탁까지 이미 내려진 터라 테세우스의 유골을 찾기 위한 작업은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이후 본격화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고대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가로 떠오른 아테네로서는 델포이의 신탁이 굳이 없었더라도 국가 통합과 국민의 자긍심 고취를 위해서는 반드시 나서야만 할 작업이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고대의 고대에 활동한 인물이었다. 현대적인 과학적 발굴 장비가 없던 때라 유해 수색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테세우스의 유해는 키몬이 찾아냈다. 이때는 스키로스에 대한 아테네의 통제권이 확고히 확립된 시점이었다. 키몬은 독수리 한 마리가 봉긋 솟은 땅을 발톱으로 파헤치는 광경을 우연히 보고는 이곳이 범상치 않은 장소임을 직감했다. 독수리가 앉아 있던 곳을 파니 거대한 관 안에 역시나 거대한 유골이 누워 있었다. 관 옆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검과 창이 부장품으로 함께 매장된 모습이 보였다. 키몬은 유골과 유해를 정성스럽게 수습해 삼단노선에 싣고서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인들은 봉안된 유해가 테세우스의 것이라고 너나할 것이 없이 믿었다. 그들은 성대한 행렬과 화려한 의식이 따르는 제사를 지내고는 유해를 도시의 체육관 옆에 조심스럽게 묻었다.

키몬이 발견한 유해와 유품이 테세우스의 것이란 확실하고 신빙성 있는 증거는 물론 없다. 핵심은 거기에 담긴 깊은 의미였다. 테세우스의 무덤은 주인으로부터 도망친 노예나, 권력자들에게 박해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테세우스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다음에나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신분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테세우스를 아테네를 건국한 영웅적 창업자로 만들어준 근본적 힘은
그의 근육질 가득한 육체의 힘이 아닌 포용력 넘치는 열린 생각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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