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존버해도 괜찮을까

주식이든 코인이든 투자와 투기는 한 끗 차이라 들었다.
돈을 벌기 위한 행위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는 해당 기업의 미래가치와 성장 가능성, 즉 펀더멘탈을 분석해보았느냐 말았느냐에서 나눠진다. 펀더멘탈이 좋은 코인은 ‘존버’해도 결국 웃을 수 있겠지만 펀더멘탈이 좋지 못한 코인은 ‘존버’하면 끔찍한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코인의 펀더멘탈을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기 힘들뿐더러, 마음에 든 코인에는 왠지 정이 가기 때문이다. 정을 붙이면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코인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펀더멘탈은 어떨까.
나 역시 스스로를 관대한 잣대로 평가하고 있던 건 아닐까.

나는 이번에 원고 마감에 지각을 했다. 지난 글에 이젠 마감이 익숙해졌다고 해놓고, 참 우스운 일이다. 2년 전, 처음 연재를 시작하기 전 난 스스로와 약속을 했다. '절대 지각하거나 휴재하지 말자'라고. 1부, 2부 연재를 거쳐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왔던 이 약속은 최근 처음으로 깨졌다. 몇 분씩 애교로 늦는 수준이 아니라 지각 허용의 한계선을 넘어버렸다. 결국 해당 원고는 정시 업로드 시간으로부터 10시간 늦게 올라왔다. 마감은 독자와의 약속이다. 내가 존경하는 만화가 무라타 유스케 선생님은 7년이 넘는 연재 기간동안 단 한 번의 지각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처럼 되고 싶었던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개인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잘난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실하게 살아왔다. 나는 의무나 책임에 강한 중압감을 느낀다. 무엇이든지 '해야 하는 일'이면 대충하고 넘기기가 어렵다. 학생시절에는 절대 결석을 하지 않았고, 좋은 성적,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군대에 가서도, 전역을 하고도. 연재도 마찬가지였다. 마감에 늦으면 안 되니까 늦지 않았다. 시기에 따라 내용만 조금씩 달라질 뿐, 맥락은 모두 똑같다. 공백기 없이 달력을 잘 채워가며 달렸고, 하면 안 되는 일은 하지 않고 해야만 하는 일은 무조건 했다. 의무로 지워진 일들은 모두 품 속에 넣고 걸어왔다. 내 삶을 최대한 굴곡 없이 평탄하고 무난하게 만들어왔다. 그래야만 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게 맞는 일 같았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다.

그렇게 성실하게 살아온 나는 왜 지각을 했을까.
군중이 나오는 어려운 씬이 있어서, 스케줄 관리를 잘못해서, 이번 주는 게으르게 보내서, 일주일 중 하루를 외출에 써서...여러가지 핑곗거리를 늘어놓아본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종종 실수는 할 수 있는 법 아니겠는가. 모든 일을 100%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답잖은 핑계들 속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다. 펀더멘탈 얘기를 괜히 한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 펀더멘탈에 금이 갔다. 의구심이 든다. 내 의욕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과정도 너무 어설프고 모자라고 부족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다. 저기 저곳엔 저렇게 멋진 창작물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데. 스토리도 재미있고 그림도 너무 멋진데. 아주 좋은 펀더멘탈을 가진 사람들이 잔뜩 있는데, 나는.
내 펀더멘탈은 너무 별로야. 이런 펀더멘탈을 갖고 앞으로의 삶을 '존버'하면 어떻게 될까. 메이저코인에게 밀려나 관심받지 못하는 코인들처럼 영원히 구석자리만 지키고 있는게 아닐까. 상장폐지만 겨우 면한채, 내가 살아온 삶처럼. 무난하고 평탄하게. 지워진 의무만 다하면서...

...창작자는 능동적인 사람이다. 무엇이든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하고싶은 일을 찾고 본인만의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 자기만의 개성이 뚜렷한 사람. 취향이 확실한 사람. 좋아하는 일에 미친듯이 몰두하는 사람.
그러한 창작자들의 유형에 나는 없었다. 혹자는 나를 '무색무취'의 사람이라 말했다. 뚜렷한 주관 없이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주는 사람.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보다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 내 삶의 방식이 그랬다. 부모님의 기대에, 주위의 시선에 떠밀려 움직였다. 그렇게 나는 수동적인 사람으로 살았다. 능동적인 창작자에는 어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글도 그림도 그냥저냥, 뭐 하나 아주 빠지는 건 없는 것 같지만 뭐 하나 특출난 것도 없는 작가. 작가라는 호칭도 어렵고 불편한, 아직 그냥... 작화가.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안다.
나만 의무에 짓눌린 게 아니고, 나만 수동적인 삶을 살아온 게 아님을 안다.
내가 창작자로써 재능이나 노력이 부족한 걸 인정하기 싫어서
살아온 이야기까지 들먹이며 엉뚱한 핑계를 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자꾸만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적어보고 싶었던 걸지도,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억지스러운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걸지도.

​스팀잇은 게시글을 삭제할 수 없다.
사실은 삭제할 수 없는 이 글을, 먼 훗날 시원하게 비웃으며 읽어볼 날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이런 한심한 글을 다 썼었네!' 하며 부끄러워 할 수 있었으면.
'이 글이 맞았었네' 하지 않았으면.



혹 두서없는 긴 글을 읽어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감사드립니다.
제 천성이 창작자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지는 오래되었어요.
여기까지 와 놓고 이제와서? 하는 생각에, 어디가서 이야기하기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요.
손절라인을 지나쳐버린 걸지도 모르죠. 허허...
그래도 잔뜩 적어내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제 가치를 남이 올려주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제가 더 열심히 해보는 수밖에 없겠죠.
노력하는 천재 무라타 유스케 선생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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