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한국적 사회적경제의 ‘투쟁’을 위해-[포획된 저항]에서 말잇기: 두번째

한국적 사회적경제의 ‘투쟁’을 위해-[포획된 저항]에서 말잇기: 두번째

*이 글은 첫번째 글과 이어진 글입니다.

2. 지금 여기의 ‘사회적 경제’에 대해

‘나, 다니엘브레이크’라는 모멘트

사회적 혁신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언급된 이 영화의 한 장면으로 시작해보자.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이 남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주인공이 구직센터에서 겪은 일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영화 포스터의 한 장면이기도 하니 말이다. 앞서 말한 그 자리에서 이 장면은 이렇게 이해되었다.

[관료화된 복지체제의 한계 -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 - 복지체제가 문제 있음 - 기존의 복지국가는 대체되어야 함]

이 장면을 둘러싸고 <가디언>지에서 제기된 다양한 당사자들의 반론들은 논외로 하자. 중요한 것은 감독의 의도나 반론을 제기한 당사자들의 생각과 다르게 하나의 사태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 때 나타나는 경로’에 대한 것이고, 이를 일종의 헤게모니 전략으로서 적극적으로 해석해보자. 그 결과는 뭘까. 바로 복지제도의 진부화다. 그 자리를 대체하는 사회적 혁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기도 전에 이미 현존하는 그것들을 낡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라 규정하고, 이를 ‘대체해야 할 것’으로 만드는 그 인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이를 복지체제의 탈정치적 해체라고 생각하고,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존의 복지정책을 강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기존의 복지정책을 파괴하는데 효과를 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텍스트의 맥락을 압도하는 콘텍스트의 맥락이 있다는 뜻이다.

큰 사회론big society라는 이데올로기

영국 보수당의 국정 아젠다였던 큰 사회론의 성격은 사실 그것이 포괄하는 ‘큰’의 내용이 아니라, 이와 댓구를 이루지만 보이지 않는 ‘작은’의 영역을 밝혀내는 것에서 그 성격을 더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이를 테면, 큰사회와 작은 정부라는 댓구, 협동조합과 기업, 사회혁신과 긴축… 이런 댓구가 가진 특징은 그대로 큰 사회론의 특징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전자가 후자를 대체한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더 노골적인 측면은 사실 그래서 전자가 후자를 잠식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 효과다.

그러니까 큰 사회론이 내세우는 큰 사회는 정부의 무능을 감추고, 긴축의 계급적 특징을 가리고, 기업의 노골적인 사익추구를 보호하는 눈 속임이기도 하고 실질적인 이해관계자의 구축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막대한 사회복지재단의 설립으로 나타날 때를 생각해보자. 기업은 시장경제의 기업논리에 의해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외의 사회적 책임에 따른 사회적 기여에 의해 보호받는다. 그러면 이 때 사회적 기여는 ‘누구를 위한 사회적 기여’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면 왜 기업의 복지재단이 하는 일은 국가의 일이 되지 못하는가.

한국의 사회적 경제가 문제라면, 그것이 내세우는 사회적 가치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의도치 않게 감추고 가려주는 어떤 것을 밝혀내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경제는 일자리인가, 산업인가

새롭게 등장한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직제를 두고 이런 저런 말이 오갔다. 이중 소위 사회적경제 비서관의 자리가 일자리수석에 일자리기획, 고용노동비서관과 함께 자리잡고 있는데 이를 경제수석 밑으로 옮겨야 한다는 취지였다. 참고로 경제수석은 경제정책, 산업정책, 중소기업, 농어업비서관이 편재되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회적경제 정책은 기존 경제정책과의 관계가 중요하지 일자리 창출이라는 것은 사회적 경제의 목표에 어긋난다는 해석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실제로 <포획된 저항>의 주요 담론분석의 결과에서 드러나듯 사회적 경제의 대표적 경제조직인 협동조합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일자리와 소득이 아닌가. 일자리와 소득은 기존 시장경제와는 다른 경제조직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일자리와 소득이 보장되기 때문에 유효한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이 강조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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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호함은 한국의 사회적경제 연합체인 <사회적경제연대회의>가 지난 대선 시기에 내놓은 주장에서도 발견된다.


2017년 대선 시 사회적경제연대회 정책제안 개요

■ 3대 핵심 정책 과제

  1. 대통령 직속 <사회적경제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
  2. 내실 있는 <사회적경제기본법>의 조속한 제정
  3. 사회적경제 활성화 및 지속가능한 사회와 경제의 실현
  1. 사회적경제의 활성화의 기반이 되는 법제도의 개선
  2. 사회적경제로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사회와 경제 영역의 확대

■ 2대 특별제안

  1. 경제약자를 보호하고 사회적경제를 인정, 육성하는 헌법 개정
  2. 중소기업, 소상공인, 사회적경제를 통한 포용적 성장의 추진

이 내용에 대해 1) 기존 농협이나 수협 등 협동조합 조직에 대한 평가가 부재 2) 세제 지원 중심의 지원 정책 제안 3) 기존 자활영역을 사회적 경제로 흡수 4) 주무부서를 기획재정부로 변경 등에 대하여 각각 논쟁적인 부분이 있으나 이에 대한 사회적 공론보다는 바로 후보자들에게 제안하여 약속받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사회적경제연대회의에 따르면 현재 사회적경제조직은 다음과 같이 소위 사회적기업 뿐만 아니라, 기존의 자활기업, 협동조합, 생협, 농협, 신협, 새마을금고 등이 포함되어 2만개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이들이 기존의 시장경제와 분리정립된 ‘사회적 경제 영역’을 가지고 있는 조직들인가, 아니면 각각 개별의 목적에 의해 설립된, ‘시장경제로부터 보호된 영역’ 혹은 ‘형식만 다를 뿐 사실상 기존 시장경제 조직과 다를 바 없는 영리단체’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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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엄형식이 말하는 바, 사회적이라는 말이 생활세계를 근대화하는 자본주의 힘과 다를 바 없는 한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고 지금 여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프랑스 식의 사회적 경제에서 보면 한국의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으로 정해진 기업윤리를 당연히 지키는 보통 기업으로나 간주될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라는 쟁점

사회적 경제의 조건은, 기존의 시장경제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남던지 아니면 행정의 보살핌을 통해서 보호된 시장으로 연명하던지의 양자에 놓여 있다. 적어도 ‘사회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에서 재생산이 가능할 정도로 생태계를 유지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를테면 생협 정도가 그럴 텐데, 광주에서 있었던 두 개의 생협간에 벌어진 매장 논쟁은 생협의 성공이 결국 시장 경제 내의 기업과 다른 가치를 추구할 지언정 그와 같은 수단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포섭과 탈주의 경쟁은 잡히고 탈출하는 식의 방식이라기 보다는 양 쪽으로 스며드는 시장논리와 사회적가치 사이의 스며듬으로 나타난다. 훨씬 극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의 쟁점은 분리정립의 여부가 아니라 스며듬의 전쟁에서 유효한 전략이 고려되고 있는지 여부가 아닐까 한다. 실제로 다양한 사회적 경제의 주체들은 성과주의적 전략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규모의 경제를 부정하지 못한다.

사회적 경제의 전략은 정부를 상대로 할 때가 아니라 시장 경제 내의 기업을 상대로 할 때 구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장 경제에 대응하는 사회적 경제의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를테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사례로서 ‘굿 바이’의 사례를 보자. 휴대폰을 개통하면 그것의 수수료를 지정한 사회단체에 기부금 형태로 납부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존에는 휴대폰 중개업자가 가져가던 개통수수료를 사회 단체에 환원하는 곳으로, 이는 정부를 상대로 하기보다는 기존의 시장 경제내 사업자들을 상대로 한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휴대폰을 지속적으로 교체할 때만 발생하는 이윤 구조는 그 자체로 너무나 자본주의적이다. 즉 낭비를 소비함으로써 이윤을 만들어내는 구조다. 이렇게 보면 소위 ‘포획’이라는 것이 상당히 중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어떤 불가능성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경제의 정치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즉, 사회적 경제가 ‘분리’하려고 하는 지점이 어디이고 ‘독립’하려는 영역이 어디냐는 질문이다. 지금까지 사회적 경제는 시장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행정의 영역에서 갈라치기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즉 국가기구의 기능을 민영화하는 수단으로서 사회적 경제라는 특징이 도드라 진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국가의 기능을 ‘소셜 임팩트’라는 이름으로 가져가 펀드를 만드는 ‘사회투자펀드’라는 이름의 주된 특징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경제는 시장경제로 건너가는 탈시장의 흐름이 아니라 기존의 정부 영역으로 시장영역이 넘어오는 오솔길이 되고 만다.

3. 사회적 경제라는 정치의 복원

가능하다면 사회적 경제를 둘러싼 시민 사회, 진보적인 지식생산체계의 연대 구조가 구축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는 지금 여기의 사회적 경제에 대한 비평구조는 포획된 저항들을 다시 ‘긴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버리면 역설적으로 사회적 경제 내의 주요 주체들에게 필요 이상의 의무를 지우는 것이 되고 쉽게 탈진시킬 수 있다.

개인적으로 2012년 마을공동체 사업의 물결 속에서 일종의 알리바이를 개발하는데 전력을 다했던 경험이 있다. 이를테면 지역 내 무급 운동가로 활동했던 이들을 유급 마을활동가로 전환하는데 이들의 운동 주체성을 지지하기 위한 논리들을 만들었다. 일단 정치적 측면에서는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이 가지고 있는 한계들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환기시켰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서울시 행정이라는 공유재를 위한 투쟁이라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긴장 관계가 곧 마을공동체 사업에 개입할 운동의 근거라는 점을 만들었다. 물론 전략의 유효함은 모르겠다. 그럼에도 사업을 ‘운동’으로 치환시켜 끊임없이 교란시키는 것이 나름 당시에 가장 고민했던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행정하고의 관계에 집중된 나머지 실제 포섭하는 힘인 시장경제와의 관계를 조망하는데에는 실패했다. 사실 잘 보이지 않기도 하거니와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경제적 자립은 곧 일정정도의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경제가 기존의 행정이 손쉬운 행정의 민영화 수단으로 여겼던 민간위탁 시장을 점유하는데 고민이 미치지 못한 것은 아쉽다(물론 이런 시도들은 꾸준히 있어 왔다). 궁극적으로 시장경제와 사회와의 위계를 역전시킬 수 있는 적극적인 전략은 고민의 지점으로 남는다. 2017. 7.[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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