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세대 언어문자 비추기

조금 스크롤압박이 있겠지만-아주 흥미로운 주제가 있다.
바로 청소년들의 언어.
나이가 청소년을 훌쩍 벗어난 분들은 흔히들 청소년의 언어문자를 지적하며 개탄하고 염려한다.
이렇게 언어를 파괴해도 되겠느냐고! 이렇게 언어가 거칠어도 되겠느냐고!
나는 그분들 앞에 가서 넌지시 묻고 싶다.
“그럼 어쩌면 좋겠어요?”
신병5(FL).png
누군가를 걱정하기는 쉽고 비난하기도 쉽다. 그러나 원인을 직시하고 대안책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청소년 언어실태에 대한 많은 조사와 보고서와 뉴스가 있다.
그것은 대부분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고는 원인을 엉뚱한 데 돌리고 있다.

디지털 문화가 문제....스마트폰 때문...영화 속 욕설이 안 좋은 영향...게임이 너무 폭력적이어서...

그게 다 이분법적인 발상 아닐까?
마치 우리 애가 탈선 한 것은 나쁜 친구를 사귀었기 때문이라는 푸념과 비슷하다.
정보가 그렇게 부정적인 것이라면 눈과 귀를 막는 독재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까?
인간의식의 암흑기인 중세로 돌아갈까?
표면만 보고 표면에서 뜯어고치려는 것은 한계가 있을 뿐더러 원인조차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고 청소년을 바라보자.
청소년만이 아니라 인터넷세대라고 할 수 있는 젊은이를 포함해야하니 신세대라고 총칭하자.

기성세대가 신세대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린다면 두 가지 때문일 것이다.

  1. 신조어
  2. 욕설(요건 다음번 주제로 남겨놓자^^)
  • 신조어(新造語)

네 살 박이 아이가 크레파스를 들고 그림을 삐뚤빼뚤 그린다. 어른들은 그게 뭘 그리는지도 잘 모르지만 빙그레 웃는다.
“산을 그린거니?”
“아니, 이건 고래를 그린 거에요!”
그러면 어른들은 놀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와! 우리 아기 어떻게 그런 신기한 발상을 했지? 여보 어서 와서 이 그림 좀 봐요!
어쩜 고래를 이렇게 그릴 생각을 했을까? 우리 애 천재 아냐?”

어떤 아이는 ‘저녁 칠곱시’라는 표현을 작문 속에 썼고 어른들은 그 표현의 신선함에 놀라며 칭찬을 해주었다.
그런데 전철에서 본 고등학생끼리 쓰는 “썸탄다.”는 표현을 곁귀로 듣고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찬다.

이상하지 않은가? 어린 아이의 독특한 발상은 경탄해주면서 청소년의 독특한 발상에는 왜 눈살부터 찌푸릴까?

혹시 이미 우리 이해의 폭을 넘어서버린 신세대의 표현에 대한 당혹감은 아닐까?
새로 나온 디지털기기를 중학생에게 주고 50대 중년에게도 줘 보자.
누가 더 빨리 그 기기를 능숙하게 쓰게 될까?
아마 초등학생도 중년 아저씨의 숙달속도를 쉽게 추월할 것이다.
신세대...청소년...그들은 나와 다른 종자가 아니며 외계인도 아니다.
그들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꼭 그들의 책임일까?
어쩌면 그들의 생각의 속도를 기성세대가 쫓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신세대는 제품으로 치자면 신형이고 기성세대는 구형인 셈이다.
구형이 신형을 비난하기 보다는 신형의 진화됨을 보고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신제품은 시험단계여서 버그도 있고 호환성에 문제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신형의 총체적 문제는 아니다.
과도기의 현상일 뿐.

청소년들의 신조어 몇 가지를 증인으로 이 자리에 불러놓고 느껴보기로 한다.
과연 그들이 함부로 언어파괴를 자행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왕성한 창조력과 번득이는 영감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있는 것인지-아니면 또 다른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자.
아래의 신조어들은 각기 나이가 다르다.
갓 나온 젖내 나는 것도 있고 연세가 지긋한 것도 있다.
읽고 그 느낌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느껴보자. 모든 것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공감은 내 그릇 안의 속사정을 보여주며 거부감은 내 그릇의 한계를 보여줄 것이다.

듣보잡;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의 줄인 말. 옛말식으로 표현하자면 미증유(未曾有)의 삿된 인간이 될까?
어휘가 주는 압축성과 기운의 통쾌함 때문에 꽤 애용되고 있다.

흑역사; 감추고픈 과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과거 등을 표현 하는 말. 공감이 잘 가는 깔끔한 조어다.

오나전; 완전의 오타. 빨리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나오곤 하는 오타. 컴퓨터세대는 공감할만하고 그 외의 세대에겐 외계어라 할만하다.

빡쳐; 머릿골을 뜻하는 박을 강조한 표현이 빡. 즉 ‘골때린다’는 말의 진화형. 이런 용어는 해설이 필요 없이 누구나 들으면 그 의미가 알아진다.

맨탈붕괴; 정신의 붕괴. 기존 프로그램이 파괴 될 만큼 당혹스런 상태. 맨탈(ㅁ)은 사실 가끔 붕괴되어줘야(ㅂ) 한다.
그래야 발전한다. 의미도 발음도 멋진 조어다.

간지난다; 간드러진 멋이 있다는 우리말(간지다)에 일본풍의 멋이 있다는 의미 ‘간지’를 결합시킨 말.
아마도 우리 말 ‘간지다’가 옛날에 일본에 전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크하다; chic-우아한, 독특한 스타일이라는 뜻. 그런데 우리가 쓸 때는 차가우며 도도하면서 멋진..이란 뜻으로 쓰인다.
왜일까? 시니컬-의 의미가 중첩된 것이며 ㅅ 은 서늘한 금기여서 차가운 도시의 이성적 이미지를 이끌어 온 것이다.

어떤가? 이런 단어가 내 신경줄에 떨어진 그 느낌이...

신조어의 대표적 특징은 압축과 합성과 은유, 비판, 그리고 공감이다.
여기서 그치면 안 된다. 왜 그런 특징들을 신세대는 선호할까?
그 의미를 살펴야 신세대의 목마름이 무엇인지 확연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빠름의 시대!
모든 발전은 속도의 효율을 추구한다.
타이핑 속도를 빠르게 하고 말을 더욱 빠르게 하기위해 압축이라는 수단이 동원되었다, 이런 단어는 어떤가?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되.’의 줄임말.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유도하려는 사람을 칭하는 말.
이것을 다 말로 표현하려면 얼마나 머리와 혀를 놀리고 손가락을 동원해야 할지 느껴보라.
그런데 세 글자로 줄였다. 답정너!
어떤 사람이 답정너인가? 바로 신세대의 부모며 선생이며 직장상사며 정치가이며 다름 아닌 기성세대다.
신세대가 단어를 압축해서 얻은 것은 효율적인 ㅁ(틀)이다.
말 자체가 ‘ㅁ’ 이며 효율적인 틀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강퇴-이제는 강제퇴장이라는 말이나 글을 쓰는 이는 거의 없어질 정도로 자리매김한 걸작압축어.

냉무-내용무-내용이 안에 없다는 말. 압축성은 탁월하나 기본발음까지 변질된 것은 조금 안타깝다.

‘네티즌’은 어떤가? 인터넷 상의 시민으로 영어의 '인터넷'과 시민을 뜻하는 '시티즌'(interNET + citIZEN)의 합성어. 순 우리말로 '누리꾼'이 제시되었고 지금은 그 말로 방송에서도 쓰이고 있다. 대안이 제시된 훌륭한 신조어라고 하겠다.

눈팅-게시판의 글을 보고 덧글 등을 달지 않고 사라지는 일.
눈+튀다+ing 기발한 조합이며 그 느낌도 생생하여 꾸준히 살아남는 용어로 자리매김한 경우다.

몸짱-몸매가 매우 훌륭하다는 표현인데 기운이 딱 들어맞게 잘 축약시킨 용어로 장수신조어가 되었다.

깨알 같은 재미-방송에서 박명수씨가 처음 쓴 말인데 신세대가 넙죽 받아들여 쓰고 있다.
사소해보이지만 효과는 큰 재미라는 뜻을 너무도 맛깔나게 표현하고 있다.

이쯤 되면 대단한 은유가 동원된 신조어다.
은유는 시(詩)의 영역!
그런 경지에 이른 놀라운 신조어들을 망으로 걸러보자.

번개팅-이제는 완전히 보편적 용어로 정착된 경우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번개와 미팅을 결합시키다니! 그 말을 최초로 쓴 이는 천재임이 분명하다.
시적 은유가 사람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상상도 못해왔던 것들끼리의 결합이 우리 뇌의 막힌 길을 터주기 때문이 아닌가?

지름신-물건을 확 사버리는 것을 지른다고 하였고 그런 충동구매의 신! 이라는 뜻.
충동구매와 신(神)을 연결한 그는 언어구사의 신이 아닐까?

짱-장(長) captain의 의미에다가 눌리고 눌리던 끝에(ㅉ) 펼쳐나간(ㅏ) 생명(ㅇ)이라는 기운을 담고 있다.
그런 이치를 논리적으로는 모르고 만들었겠지만 그 기운이야 모르겠는가?
짱을 창조한 자, 정말 짱이다!

쏘다-함께 먹고 돈을 지불하는 것. 총알과 돈을 이은 그 비약이 참으로 신선하다.

귀차니즘-귀찮다+ism. 직관적이고 탁월한 연결감이 있다.

신세대의 합성어들은 국가의 경계 따위를 너무도 쉽게 부숴버린다.

썸-이라는 기묘한 신조어가 있다. 'Something'에서 유래된 언어. 연인 관계는 아니나, 연인 관계로 발전 가능성이 있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원래는 썸씽이라는 단어로 쓰였으나, 영어 발음과 비슷한 바람에 현재의 단어에 오게 되었고, '썸 탄다' 등의 단어로 쓰인다.
썸을 타는 남자는 썸남, 썸을 타는 여자는 썸녀.
영어의 멱살을 당겨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솜씨!

한글전용을 외치는 분들이 이런 외래합성어를 보면 이마에 내 천(川)자가 아로새겨지겠지만 나는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어린 시절에 우리가 만든 신조어를 기억하는가?

꼰대-학생이 선생님을 이르는 표현이었으며 원래는 늙은이를 일컫는 말이었다.

구름과자-담배를 일컫는 추억의 은어다.

기똥차다-기가 동하며 꽉 차오를 만큼 대단한-조금 격하긴 하지만 재미난 표현이었다.
우리 윗세대들은 그런 단어를 들으면 어땠을까?

‘아리랑’도 어느 시절의 신조어였을 것이고 ‘얄리얄리얄랑셩’도 그 당시의 구세대는 듣기 싫어했을 신조어였을 것이다.
모든 세대는 새로운 정신과 용어를 추구했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새로운 단어는 굳어져가는 정신계의 봉창을 뚫는 일과 같아서 신선한 바람을 끌어들인다.
다만-맑은 바람만 들어오겠는가? 먼지도 들어오고 때로는 쓰레기도 날아 들어온다.
그것이 두려워 문도 창문도 닫으면? 문화는 질식하고 만다.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도약의 독보적 존재가 바로 세종대왕이심을 돌이켜보자.

신조어는 당면한 시대를 아주 잘 표현해주는 시금석이다.
쓰레기 같은 조어들은 세월의 바람에 휘날려 사리지게 되고 금쪽같은 조어들은 살아남아 공식적인 단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면 어떤 신조어든 가만 놔두자는 이야기인가? 그것은 아니다.
“이런 저런 말을 쓰지 말란 말이야! 이 무식한 젊은이들아!” 이런다고 될까?

지성(知性)이 할 일은 오로지 밝게 비쳐줄 일이다.
밝게 비쳐주면 사라지는 어둠-
어둠에 어둠을 퍼부으며 싸우는 짓은 어둠의 총량을 늘릴 뿐이다.

기발하고 기특한 신조어라면 함께 쓰며 즐기자.
그것이 시대의 파도를 타며 즐기는 이의 모습이다.
여기까지가 나 자신을 포함한 기성세대에게 드리는 글이라면 이제 신세대 풋풋한 님들에게 얘기하고픈 것이 있다.

청소년과 신세대에게 금지하고 싶은 것은 없다.
하지만 넌지시 권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풍요로운 어휘를 써보라는 것이다.

우리 한글의 보물창고 속에는 내가 알면서도 한 번도 쓰지 않은 엄청난 어휘가 있다.
또 아직 모르는 주옥같은 어휘도 바다의 모래처럼 많다.
윤슬(빛을 튕기는 물결)...예그리나(사랑하는 우리 사이)...시나브로(은근히 조금씩)...
미리내(은하수)...이런 어휘는 얼마나 찬란한 빛을 뿜는가?
혀끝에서 진주알이 굴러 나오는 느낌 아닌가?

그 정도가 아니라도 흔히 알면서도 안 쓰는 어휘들을 떠올려보라.
비마중(비를 나가 맞이하는 일)...살랑살랑...우수리...도란도란...가시내...

신세대여! 일상 속에서 이런 어휘를 한번 두 번 써볼 자신이 있는가?

그 막대한 기본적 명품유산을 팽개쳐놓고 새로 나온 거리의 신제품만 몸에 두르고 다니는 모습은 생각 없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우물을 깊이 파지 못하고 자꾸 딴 우물을 파는 경박함이 있다.
남이 쓰니까 나도 써야할 것 같다? 그래서 쓰는 거라면 그 모습은 처량 맞아 보인다.
신조어를 창조하는 것은 센스다.
그런데 남이 만든 신조어를 넙죽 받아먹고 그 단어들의 틀 속에만 갇히는 것은 넌센스다.

말은 아름다우나 말에 갇힘은 추하다.
학교나 인터넷동호회-특정집단 특정세대에 속한 그대는 신조어를 써줘야 공감을 느끼게 되고 안심하는가?
그것이 소극적인 공감이라면 풍요로운 어휘는 적극적인 공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그것은 이미 충분한 사례가 나온 결과다.
추사체를 창조한 추사는 위대하지만 추사체만 모방하는 아류(亞流)는 답답하다.
신세대여! 그대는 추사인가? 아니면 그 아류인가?

압축은 빠름을 위해 효율적이다. 하지만 느림은 어디로 갔는가? 느림에도 지고한 의미가 있다.
청소년이여! 빠름의 질주 속에 느림의 아름다움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직선의 시원함에 젖어 곡선의 은근함을 도외시한 것은 아닌가?

좋은 말, 좋은 글은 일류 요리와 같다.
그런 요리를 자주 맛보기를 권한다. 그런 소설과 수필과 시를 사랑하기를!

핸드백 명품만이 아니라 글의 명품을 사랑하는 사이에 감각과 감수성의 격이 사뭇 높아지고 깊어질 것이다.
그렇게 바탕을 튼튼히 한 다음 유행어나 신조어는 살짝 뿌려주는 후추가루 정도면 된다.
그것이 주가 되면 어떨까? 그건 라면이나 튀김으로 주식을 삼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거리의 음식에 젖어 살 것인가?
일정 나이에 이르면 예전에 즐겨 쓰던 단어들이 썰물처럼 주변에서 사라질 것이다.
부장님도 김대리도 거래처 사장님도 그런 단어를 쓰지 않을 것이다.
그때-내 안에 남아있을 단어는 무엇일까?
혹시 유행어, 인터넷신조어를 빼면 낙엽만 몇 잎사귀 뒹구는 것은 아닐까?

사용어휘가 그대의 뇌의 상태를 만든다.
어휘의 빈곤은 뇌를 일부만 쓰고 사는 모습이다. 치매환자의 뇌상태를 예약해두는 것과 같다.

신조어는 맛으로 치면 톡 쏘는 청량음료요, 기름에 튀긴 닭과 유사하다.
우선 시원하고 우선 맛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가끔이어야 제 격이 아니겠는가?
사용하지 않은 뇌의 신경망은 급속히 기름으로 채워지고 도로는 폐쇄된다.
유행어 신조어 좋다! 다만 기본 어휘를 충분히 알고 쓰자!

우아한 품(品)과 고상한 격(格)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팝콘이 있는가?
지하저장소에서 100년 묵은 와인을 꺼내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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