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체스

닥터가 또 잠수를 탔다. 분명히 미국 시간 토요일 저녁 일본 시간 아침에 영상통화를 한다고 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런건지 생각하는 것도 이제 포기했다. 오늘은 회사의 다른 여자 동료와 Chaumet 보석컬렉션 전시회를 보러가기로 해서 외로워할 겨를 없이 밖에 나갔다.

보석전시회는 상상이상으로 경이로운 크기의 보석들로 된 여러 시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서 볼거리가 풍성했다. 특히 나폴레옹의 첫번째 와이프였던 조세핀을 위해 만들어진 장신구들이 어마어마했는데, 정말 왜 여자들이 권력과 돈이 많은 남자에게 끌리는지 납득이 갔다. 영국의 왕실에 시집간 케이트 미들턴도 일평생 온갖 멋진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하는걸 즐기려고 정말 작정하고 윌리엄 왕자를 손에 넣은 것 같다. 멀쩡하게 대학을 나왔는데 제대로된 직업하나 가지지않고 (아버지 회사에서 잠깐 일했단다...) 취집한 케이트 미들턴은 그냥 영국판 김치녀라 생각한다.

동료와 수다도 떨고 여름세일기간이라 예쁜 옷가게에 가서 쇼핑도 하고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나 집에 오니 어김없이 허전함이 느껴졌다. 혹시나 닥터에게 연락이 왔을까 핸폰을 계속 봐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기분이 우울할 때는 좋아하는 드라마나 봐야지. 오늘 내 기분에 맞는 드라마는....야마토나데시코다!

2000년에 제작된 야마토나데시코라는 드라마의 한국말 제목은 내 사랑 사쿠라코이다. 마츠시타 나나코와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일본남자배우 츠츠미 신이치의 리즈시절 드라마이다. 사쿠라코(마츠시타 나나코)는 김치녀이다. 가난하게 자라서 돈많은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열심히 소개팅과 파티에 가는 미인 스튜디어스이다. 남자의 시계 차키등을 노골적으로 스캔하는 그런 여자이다. 그런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어머니와 생선가게를 하는오오스케 (츠츠미 신이치). 부잣집에 생선을 배달해 주다가 우연히 주운 부잣집 할아버지의 마주(말을 가진 사람이 갖고 있는) 핀을 양복에 꼽고 그룹 소개팅에 나갔다가 사쿠라코를 만났다. 사쿠라코는 마주핀 때문에 그가 엄청난 부자인 줄 알고 계획적으로 대쉬를 했지만 나중에 오오스케가 가난뱅이인걸 알고 마음이 돌아섰으나, 계속 앞에 얼쩡거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를 챙겨주는 오오스케에게 점점 빠져든다. 근데 오오스케는 솔직히 사쿠라코를 순수하게 좋아하기 보다 자기 옛애인과 너무 닮아서 끌린 것이다. 그리고 오오스케는 실은 생선가게 아저씨가 아니라 MIT에서 박사학위과정을 밟았다가 중도에 포기한 천재수학자이다. 아무튼 결말은 뭐 이 둘이 맺어진다는 것인데, 드라마 캐릭터이지만 케이트 미들턴처럼 김치녀가 안되고 사랑을 택한 사쿠라코가 난 좋다. 마지막회의 그녀가 입은 소박한 결혼식 드레스도 정말 이뻐보였다.

이 드라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오오스케가 MIT동창의 결혼식에 가서 스피치를 하는 장면이다.

"물리학자 Richard Feynman는 이런말을 했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은 하나님의 체스를 옆에서 바라보면서 어떤 아름다운 법칙 또는 룰이 있는지 찾는것이라고. 처음부터 그러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무 의미도 뜻도 없는 일들의 반복일 뿐이라면 수학자들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 지루한 우주에서는 정말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친구는 체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소중한 반려자도 만났습니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인연은 하나님의 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둘이 어디선가 만났어도 그대로 스쳐지나가서 서로를 알게 되고 말을 하게 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이 피로연장에서 해피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 친구는 운명이라는 제일 어려운 수수께끼의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크...역시 몇번 들어도 가슴을 울리는 스피치이다. 명장면을 포테토칩과 치즈와 함께 즐기려고 했는데 닥터의 생각이 다시 났다. 그는 대학 때 수학클럽 멤버였는데 나한테 수학클럽의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잘 나온 사진이라 보내줬다. 사진의 그의 표정도 좋았지만 내 눈을 끌은 것은 티셔츠 가운데에 박혀있는 수학 공식에 의해 만들어진 입체적 하트모양. 이성과 감성이 결합된 그 모양이 박힌 티셔츠를 입고 있는 Geek(범생이)같지 않은 몸을 가지고 강아지같이 선한 눈을 가진 닥터를 보고 사랑에 빠진 것 같다.

물론 그가 정말 많은 여자들에게 그 사진을 뿌렸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나는 하나님께 묻고 싶다. 하나님의 법칙이 무엇이길래 난 이렇게 연달아 이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계속 실망만 겪는 것일까?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주인공이 4차원의 시공간에서 엄청난 힘을 다해서 지구에 있는 딸이 생존할 수 있도록 신호를 준다. 시공간을 넘어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난 이 장면을 보면서 이게 하나님의 사랑인 것일까? 라고 생각해 봤다.

그럼 지금 하나님은 온 힘을 다하셔서 닥터와 내가 연결되지 않도록 간섭하고 계시는 것일까?
난 물리학자도 수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체스의 룰을 풀 수도 없고 풀고 싶지도 않다.
물론 지난 이틀간과 같이 좋은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면 순간의 기쁨이나 만족이 있지만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의미가 없는 일들의 반복처럼만 느껴진지가 꽤 오래된다. 오늘 페북에서는 혼인신고서를 한 커플만 2쌍이고 결혼식이니 아기 출산이니 정말 페스티발이 펼쳐지고 있다. 내일 일어났을 때 닥터에게 연락이 없다면 난 하나님의 체스판을 엎어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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