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네팔 대지진 출장기]6. 신두팔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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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hiho입니다. 오늘부터는 신두팔촉에 갔던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신두팔촉은 카트만두 북동쪽에 있는 넓은 산간 지역의 이름입니다. 인구 대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합니다. 저는 신두팔촉에 두번 갔었습니다. 순간순간 기자의 정체성과 한 사람의 감수성 사이에서 갈등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신두팔촉 이야기는 2회 이상 이어질 예정입니다. 바로 써내려가겠습니다.

나는 신두팔촉에서 성한 집을 한 채도 보지 못했다.

도착한 첫날 참상을 스케치했지만 다음날 쓰지 못한 이유는 신두팔촉(신두파초크)으로 가는 기아대책 구호단 일행을 따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언제 써도 크게 상관없는 스케치보다는 당장 일어난 상황을 써서 하루를 버티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다.

출발 전날 밤 브리핑에서 네팔에 살고 있는 문 선교사가 신두팔촉의 피해상황을 브리핑했다. 2015년 4월 29일 밤까지 1300여명이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인구는 카트만두의 10분의 1도 안되는 30여만 명. 나중에 집계된 걸 보니 당시 지진 사망자 중 40%가 신두팔촉에서 숨진 것으로 나왔다. 몇 시간 전 신두팔촉에 다녀왔다는 CBS 후배를 만났는데 흙덩어리가 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가는 길은 간단치 않았다. 카트만두와 신두팔촉은 직선거리로 약 25km 밖에 안 떨어져 있었지만 그 많은 산을 뚫어 터널을 낼 기술이 없는 나라인지라, 산 허리를 빙빙 둘러서 길이 놓여 있었다. 그런 길마저 지진 피해로 상태가 온전치 않아, 차를 타고 서너 시간을 가야 했다.

우리는 몇 대의 4륜구동 SUV와 트럭을 나눠 타고 신두팔촉의 입구에 해당하는 시파갓 마을로 향했다. 카트만두의 도로엔 차선이 없었다. 카트만두를 벗어나자 비포장도로가 중간중간 나왔다. 길가에 포격을 맞은 듯 부서진 건물들이 지나갔다. 카트만두 외곽엔 벽돌을 굽는 가마를 낀 벽돌공장들이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네팔에서 널리 쓰이는 건축재인 적벽돌은 흙으로 빚어 장작을 태우고 남은 열기로 굽는 방식이라 강도가 약했다. 부잣집을 제외하고 이런 벽돌로 만들어진 집들이 태반이라 지진에 속절없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카트만두에서 본 부서진 집들은 대부분 뻘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비구비 길을 돌아 가는 중에 카트만두에서 신두팔촉으로 가는 차와 오토바이가 상당히 많아서 조금 놀랐다. 버스엔 사람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다. 차선도 없는 도로에선 위험천만한 순간들이 자주 일어났다. 사고가 났는지, 나자빠진 오토바이 옆에 사람이 드러누워 있는 장면도 목격했다. 그러거나말거나 차는 부지런히 덜컹거리며 갈 길을 갔다. 산길 중턱에 무슨 카페 같은 게 있었다.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카페는 등산, 트래킹 하는 사람들을 보고 운영 중인 것 같았다. 기아대책 간사가 건네 준 네팔식 밀크티(였던 걸로 기억한다)를 받아 마셨다. 네팔에서 먹은 네팔음식 중에 그나마 먹을만 했다.

카페에서 엄홍길 대장을 만났다. 한국 적십자 구호단장인지 뭔지 감투를 썼다. 그에 관한 평가는 생략하겠지만
그의 활동은 TV를 통해 드러났고 히말라야를 밥먹듯 간 만큼 유창한 네팔어를 구사했다. 그는 드러났지만,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의 노력이 훨씬 컸다.

지진으로 굴러내려온 커다란 바위가 도로 중간에 놓인 걸 종종 볼 수 있었다. 산간 국가의 산간지역으로 들어섰다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시파갓 마을 입구 앞엔 시냇물인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인드라와띠 강의 지류라는 설명을 들었다. 입구 물가에 '갓'(힌두교식 장례를 치르는 강가의 화장터)이 마련돼 있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쓰려고 만든 것 같았다. 갓 위엔 타다 남은 숯 무더기가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누군가 가족의 장례를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을은 정말 신두팔촉으로 들어가는 길목 같은 위치에 있었는데, 그 길목이 다 무너져서 길이 끊어진 꼴이었다. 마을의 건물 1100채 중 215채가 무너졌다고 했다. 길가에 건물이 늘어선 형태였을 마을은 차라리, 하나의 거대한 돌무더기였다. 그 돌무더기들을 밀어내고 길을 뚫기 위해 포크레인이 들어와 있었다. 결국 우린 그날 마을에서 더 들어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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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차에서 내려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건장한 청년들로 구성된 마을 자경단 정도 되는 사람들과 선교사가 부지런히 이야기를 했다. 여기서 결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구호단은 물자를 풀었다. 이날 라면 30개들이 500박스, 천막 250개를 나눠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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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은 마을 곳곳을 다니며 참상을 스케치했다. 마을 주민들은 모든 것을 잃어 놓고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 마스크 없느냐" "그 쪽은 가면 안 된다 위쪽 건물이 무너질 수 있다"고 이방인 기자를 챙겼다. 나는 데스크를 받기 전 기사에 이렇게 썼다.

포클레인은 이미 파헤쳐진 마을을 다시 헤집었다. 주민들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더러는 뻥 뚫린 천장 밑에서, 난간이 떨어진 발코니에서 목을 길게 빼고 포클레인을 쳐다봤다. 포클레인이 무언가를 퍼 올릴 때마다 이들의 새카만 눈동자가 이를 좇았다.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집이 있던 자리엔 돌무더기만 남아 있었다. 아낙은 망연자실한 채 그 위에 걸터 앉아 있었다. 신발을 신지 않은 노인은 부러질 것 같은 농기구로 돌무더기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천진하게 뛰어다니다 덜 무너진 건물 근처에 갔다가 아버지에게 혼쭐이 났다. 가족들은 요리인지 곡식 한 줌인지 모를 식사를 마치고 아낙은 소똥무더기 옆 도랑이나 새어나온 논물에 설거지를 했다. (2신 기사 링크)

문 선교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식수였다. 심각한 수자원 부족 국가인 네팔에서 수인성 전염병 등으로 2차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네팔에서 부족한 것이 물이 아니라 수자원이라고 설명한 데엔, 물은 많은데 쓸 수 있는 물이 없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기사에 썼듯 네팔 사람들은 어디 물이라도 고여 있으면 그걸로 그릇을 씻는 등 아무 물이나 막 썼다. 소가 옆에서 똥을 싸고 있는데 그 옆 논에서 물을 받아다 설거지를 하는 모습도 종종 봤다. 문 선교사가 걱정하는 이유는 무너진 건물 속에 부패한 시신이 누워있는데 거기서 나온 물도 아래쪽으로 가면 다 섞여서 결국 누가 쓸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문 선교사의 괴로운 예측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돌무더기 속에 시신이 누워있고 사람들은 들어갈 집도, 야생을 피할 곳도 없었다. 남의 집 살이를 하거나, 나눠준 천막에서 야영을 해야 했다. 복구작업은 진척이 없는데, 국제구조팀은 입구만 더듬다 카트만두로 돌아갔다. 신두팔촉 사람들은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했다.

네팔을 나온 뒤 집계된 수치에 따르면 신두팔촉 인구의 60~70%가 지진 피해를 입었다. 이 지역 사망자는 3,107명으로 네팔 전체 지진 사망자의 40%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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