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네팔 대지진 출장기]13(끝).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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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hiho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네팔 연재를 끝낼 시간이 됐습니다. 본래 귀국과 후기를 같이 쓸 생각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후기로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네요. 이번 회는 귀국만을 담았습니다. 제가 들려드리고 싶었던 이야기의 끝입니다. 후기는 연재의 넘버링에 넣지 않고 편안하게 쓰겠습니다.

네팔에서 지낼 기간이 일주일 정도 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올 날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현지에서 상황을 계속 체크하다 보면 귀국 시점이 가까워지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시민들은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썼다. 상점들 문이 하나둘씩 열렸다. 쓰러진 건물을 고치거나 새 건물을 다시 짓기 위한 노력은 빨간 벽돌 공장의 성업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시민의 시선이 정부를 향하기 시작했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기득권에 대한 비판이 거리로 쏟아졌다. 작은 규모의 시위가 잇따랐다. 거리에 추모와 항의의 촛불이 켜졌다. 비판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땐 일어나지 않는다. 추모 역시 생존이 확정된 이들의 몫이다.

국가가 재난 상황에서 복구 국면을 거쳐 안정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는 복구 국면에 네팔에 들어왔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한-네 친선병원에서 우리나라 해외긴급구호대(KDRT)의 활동상을 스케치한 기사를 보내고 나자,
데스크에서 연락이 왔다. 6일 취재기를 출고하라는 지시였다. 취재기는 취재가 끝났을 때 쓴다. 취재기를 쓰라는 지시는 복귀 명령과 다름없었다.

앞서 귀국한 국민일보 선배가 쓴 취재기에 주변 많은 사람이 눈물을 쏟았다. 필력 좋기로 유명한 선배처럼 좋은 글을 쓰고 싶었다. 다만, 선배보다는 담담하게 쓰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썼다.

재앙이 강타한 지 12일째. 마지막 글을 쓰고 공항으로 갑니다. 기자가 목도한 고통의 단편들이 네팔인들의 남은 인생에서도 이어질 거라 믿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다시 일어설 겁니다. 산간마을에서 만난 청년은 말했습니다. “마을을 세울 때처럼 다시 일으키는 것도 어차피 우리 손으로 해낼 것”이라고. (취재기 보기)

취재기를 쓰면서, 네팔에서 만난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갔다. 지진을 겪고 부서져 버렸지만 아직도 너무나 아름다워서 오히려 가슴아팠던 풍경들. 처참한 배경 속에 찬란한 햇볕을 등진 채 손을 모아 "나마스떼"라고 인사하던 크고 검은 눈동자의 꼬마. 수돗가에서 조각비누를 내밀던 소녀. 어니샤 어짜리아의 잘린 혀와 아무렇게나 꿰맨 검은 실... 나는 이렇게도 썼다.

8일이란 짧은 기간, 기자가 만난 네팔 인은 이런 고통을 겪기에는 너무도 선한 이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비누조각을 찾아내 이방인 기자에게 흙먼지를 씻어내라고 건네는 사람들입니다. 다치고 병든 몸으로 의료 지원을 받으러 와서는 의료진 소매에 붙은 쇠파리를 맨손으로 떼어내는 사람들입니다. 한국국제협력단 단원이 말했습니다. “저는 신을 믿지 않아요. 신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진 않았을 거예요.”

네팔 사람들처럼 담대하리라 다짐했던 마음이, 스쳐가는 장면들 사이에서 무너졌다. 담담한 글을 쓰기 위해 중간에 몇 번이나 멈추고 마음을 추스러야 했다. 차라리 네팔에서의 생활이 너무 불편해서 정나미가 떨어졌다면, 소매치기라도 당해서 이들을 욕할 수나 있었다면 어땠을까.

2015년 5월 7일 이른 아침, 한국을 떠날 때 입었던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 입었다. 전날 마신 술로 얼굴은 부었지만 네팔을 떠나기 전 마지막 얼굴을 가족에게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 면도 따윈 기대조차 하지 않아서 면도기를 챙기지도 않았다. 수염을 한 번도 못 깎았고 몰골이라면 몰골이 됐는데, 그걸 가족에게 다짜고짜 맨눈으로 보여주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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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사진을 보냈다.

일찌감치 짐을 싸서 차에 싣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봤다.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는 여기서 안전했다. 현장으로 나가는 길에 항상 지나던 공터에 헬리콥터가 내렸다. 뭘 실어가려는지, 뭘 실어 온 건지 모르겠지만 헬리콥터가 신기한 아이들은 무작정 그리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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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나갈 때 맨날 지나치던, 택시를 타고 마을로 돌아올 때 이정표로 삼았던 거리도 사진에 담았다. 그냥 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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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올 때도 방콕을 경유했다. 비행기에 한고은을 닮은 여자가 타고 있었는데 한고은이었다. 네팔에서 무슨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고은이 한고은 닮은 여자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도저히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고은이 늙지 않은 이유를 과학에서 찾아야 할지 의학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비행기가 한국 상공에 가까울 무렵, 동이 트고 있었다.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이제 모든 불편함과 아쉬움, 불안정함을 떠나 집에 돌아왔다는 게 느껴졌다. 공항에 내려 휴대전화를 켰는데 당시엔 여자친구였던 아내의 카톡과 문자가 와 있었다. 공항에 와 있단다.

아내는 나의 출장이 결정되는 순간부터 힘들어했다. 불안해 했고 울기도 했다. 그의 힘듦은 어머니의 힘듦과 근원은 갖지만 표출되는 모양은 달랐다. 어머니는 오로지 안으로 삭였고, 아내는 보여줬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네팔에서 나의 힘듦을 어머니에겐 감췄고 아내에겐 드러냈다.

약 열흘 간 겪었던 외로움과 두려움에 대한 보상으로 아내가 원한 건 한시간이 채 안되는 동안의 만남 뿐이었다. 아내는 나를 안아주고 공항에 같이 잠깐 앉아 있다가 버스를 타고 인천 집으로 갔다. 그는 아내가 아닌 여자친구로서, 내가 돌아온 날을 가족에게 양보했다. 내가 네팔에 있는 동안 아버지는 환갑을 맞았다. 그 날 아내는 아버지에게 커다란 꽃바구니를 보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밖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모자는 서로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누가 먼저 울음을 터뜨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끌어안은 채 한참 울었다. 기자로서 커다란 경험을 무사히 마친 것이 감격스러웠고, 무엇보다 무사히 돌아온 게 다행이며, 감사하단 마음이 컸다. 자식새끼가 걱정 끼치면 잠 한 숨 제대로 못 자는 어머니가 보나마나 열흘 간 고생했을 게 뻔했다. 미안한 마음도 아주 컸다.

감정을 추스른 뒤 아버지께 전화를 했다. 그 뒤 호주에 있는 동생에게 카톡으로 도착한 걸 알렸다. 회사엔 보고체계대로 캡에게 먼저 전화한 뒤 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기사를 깐깐하게 보기로 유명한 부장은 "보낼 때 기대했던 건 이정도가 아니었는데 그것보다 훨씬 잘해서 놀랐다"고 했다.

이렇게 내 기자 인생에서 가장 큰 경험으로 남을 네팔 출장이 끝났다. 나는 금요일이었던 그날과 그 주 주말을 모두 쉬고 월요일에 출근했다. 월요일에 무사 복귀를 축하하는 부서 회식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네팔에서 겪은 일들을 무용담처럼 떠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역시, 선배의 무용(武勇)담은 후배에게 무용(無用)담일 뿐이다. 기자 선배들은 젊은 날 특종 하나, 경험 하나를 수십년 동안 후배들에게 이야기한다. 몇 번을 만나서 술을 마셔도 몇 번이고 한다. 대체로 후배들은 철지난 이야기들을 지루해 한다. 기자의 위상과 언론 현실이 완전히 달라진 지금까지 수십년 전 얘기를 들먹이는 게 못마땅하기도 하다.

나는 먼저 물어보지 않는 한 네팔에서 겪은 일들을 세세히 이야기하지 않아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에게 無用담이 되기엔 내 기억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혹여 누군가 거기서 겪은 일을 물어본다해도, 지금까지 14편의 글에 쓴 것보다 자세히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2015 네팔 대지진 출장기'를 읽어주신 한국 스티미언들께 커다란 감사를 드립니다. 너무나 커다란 성원,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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