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TV 방송의 첫발

1956년 5월 12일 한국 TV 방송의 시작

사연은 태평양 전쟁까지 거슬러 오른다. 처음에는 기고만장 잘 나갔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후 기세가 꺾이고 차츰차츰 밀리다가 가미가제와 반자이 돌격으로 연명하며 패전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던 일본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무진 애를 썼다. 조선총독부는 그런 정세가 한국인에게 전파될까 봐 '외국 단파 방송 청취 금지령'을 공포하고 한국에 와 있던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방송을 알았던’ 경성방송국 한국인 직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과 중국 국민정부가 송출하는 중경방송국 한국어 방송을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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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만은 아니었겠지만 일본은 망한다는 소문이 꽤 파다하게 퍼졌고, 일본 관헌들은 꼭 60여 년 뒤 “누가 양초값을 댔느냐”고 물은 아무개처럼, “누가 외국 방송을 듣고 있는 거냐?”고 이를 갈았고, 자연스럽게 경성방송국 직원들이 그 성마른 마수에 걸려들고 말았다. 1942년 말부터 1943년에 걸쳐서 경성방송국은 쑥대밭이 됐다. 경성방송국 직원 6명을 비롯 150여 명의 방송인과 민간인 수백 명이 체포됐다. 당시 방송인 150여명이라면 거의 조선 땅에서 방송을 안다는 사람의 대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가운데 6명은 창살 안에서 숨져 갔다. 고문 후유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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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풍에 휩쓸린 사람 가운데 황태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평안도 출신의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며 방송 기술을 익혔고, 1935년 경성방송국에 입사했다가 전북 이리 (요즘은 익산) 방송국의 기술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단파수신기를 만들 줄 알았던 그는 수신기를 만들어 집에서도 듣고 회사에서도 듣고 하다가 그만 된서리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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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감옥살이는 면했지만 엄청난 벌금을 물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방송 업계에 종사하면서 미국 RCA사 한국 지사를 운영하던 중 정부로부터 방송 장비 수입을 의뢰받고 미국에 간 길에 동전을 넣고 TV를 보는 미국인의 모습을 보고 색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도 TV 방송국을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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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서 죽는 아이들이 속출할만큼 전쟁의 뒤안길에서 헤매던 나라에서 TV 방송이라니! 관련 기관 공무원들은 단호히 황태영의 꿈을 거부했다. 하지만 황태영도 만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한국어 문장에는 뜻밖에 서툴렀지만 영어와 한자에는 능통했던 희한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에게 영문으로 구구절절 상소를 써서 올렸고, 이승만이 공무원들에게 “님자들 이거 한 번 해 보라고 하지 그럽네까?” 한마디 하면서 마침내 황태영은 1956년 5월 12일 한국 최초의 방송국 설립자가 된다. HLKZ TV 라는 이름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태국 필리핀에 이은 4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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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송국의 방송 제작을 지휘한 사람이 최창봉이다. 1990년대 초 손석희가 구속되었던 MBC 파업 투쟁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의 이름도 귀에 설지 않을 것이다. 그때 MBC 노조가 물러가라고 목이 쉬었던 사람이 바로 최창봉 당시 MBC 사장이다. 그의 머나먼 미래는 그렇다고 치고, 그는 한국 TV 방송의 산파라고 해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최창봉의 얘기를 옮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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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방송 개시를 앞두고 5월 12일부터 3일간의 시험 방송준비 지시가 하달된 것은 요원들이 정시 출근을 시작한 5월 1일이었다. 장님들이 코끼리 다리를더듬어 볼 시간적 여유는 11일 뿐이었다. ”

그 장님들이 그린 코끼리가 마침내 5월 12일 시험방송 겸 개국이라는 이름으로 그 둔중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방송 전파를 탄 프로그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성경린씨가 지휘한 만파식적지곡과 수제천의 아악 연주였다. 전국에서 이를 지켜본 사람이 극장 하나의 관객 수보다 적었던 TV 방송의 시작이었다. 이후 2시간 동안 영화와 가요 등이 어우러진 국내 최초의 ‘버라이어티 쇼’가 펼쳐졌다. 이때 신카나리아, 박시춘 남인수 등이 출연했는데 이들의 소속사에는 출연료 대신 ‘무료 광고’의 혜택이 주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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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한민국을 통틀어 TV 수상기가 수백 대를 넘지 못하던 시절의 TV 방송국이란 개미 다리 위에 얹어진 코끼리 몸집같은 존재였다. 가장 큰 수입 중의 하나가 가두에 설치된 TV를 신기하게 보고 몰려든 사람들을 노린 광고료였다고 하니 알만하다. 1년을 버티던 HLKZ-TV는 한국일보에 넘어갔고 DBC로 재단장하여 제법 방송국다운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면서 한국 TV 방송을 개척해 갔으나 그만 불의의 화재를 만나 홀라당 다 태워 먹고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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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 티븨까지 치면 수십 개에 달하는 채널들을 이리저리 재핑하다 보면 그 명징하고도 화사한 화면과 사람들의 혼을 빼는 재미와 감동으로 무장한 수백 개의 프로그램의 홍수에 질려 결국은 전원 버튼을 꺼 버릴 때가 있다. 그 큰물의 시작이 1956년 5월 12일이었다. 사진은 8세난 윤복희 어린이가 열창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그 윤복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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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방송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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