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과 손양원 목사, 그리고 '항쟁' 불가의 이유

여순사건 70 주년을 맞아
손양원 목사와 여순'항쟁' 불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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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봉기는 가공할만한 유혈 진압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군 병력을 증강 투입하여 제주도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고 새로이 구성된 14연대에 출동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10월 19일, 하사관들을 중심으로 한 14연대 내 좌익들은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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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장교들부터 죽였습니다.그런데 죽음을 당한 장교들 대부분은 선(線)이 달랐을 뿐 좌익 조직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몰려오는 반란군들에게 “잠깐만 우리는 동지다.”라고 외칠 새도 없이 총탄에 심장이 뚫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조직적이지도, 준비되지도 않았던 봉기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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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참상은 봉기 소식을 듣고 달려온 후일의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이건 당적 과오다!”라고 부르짖게 만들 정도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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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는 원래 항구 도시로 좌우익 갈등이 크지 않은 도시였으나 (그래도 반란군들은 수백명을 학살했습니다)내륙의 순천은 그렇지 않았고, 순천의 좌익세력들은 봉기군과 합세하여 우익 세력에 대한 공격을 단행합니다. 친일 경찰이 주류를 이루던 경찰은 당시 군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충돌도 빈번했던 바, 경찰들은 좌익들의 표적이 됐고, 지주나 기독교인들 우익 인사들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순반란.jpg

그러던 중 10월 21일 이미 눈에 여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기가 번들거리는 청년들이 또래의 청년들을 잡아 끌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은 순천사범학교 기독교 학생회장 손동인이었습니다. 그를 거칠게 잡아채고 있는 사람은 안재선이라는 좌익 학생이었습니다. 봉기 전 순천 시내의 좌우익 갈등에서 둘은 여러 번 부딪친 바 있었죠. 거기에 한 명이 더 끼어듭니다.

“나도 예수쟁이야.. 죽일라면 나도 죽여. 나도 예수쟁이니까.”

맹랑한 중학생은 손동인의 동생 손동신이었습니다. 형제는 용감했지만 용기의 댓가는 끔찍했지요. 잠시 후 둘은 시체가 되어 다른 시신들과 함께 차곡차곡 쌓입니다. 비명에 간 형제는 애양원이라는 나환자촌을 운영하며 봉사하던 손양원 목사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렀던 그리 흔치 않은 목사였던 손양원은 나환자들을 성실히 돌보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딸은 “아버지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버지는 분명 우리 남매의 아버지인데 내가 볼 땐 나환자들의 아버지인 것만 같아 보였다.”고 증언하고 있거니와 나환자들을 위해 몸바쳐 일하던 목사의 생때같은 두 아들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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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가 그 사실을 안 것은 4일 뒤였습니다. 2남 3녀 중 두 아들의 죽음이란 그야말로 기가 막힐 일이었지요. 부인과 딸들은 머리 풀고 통곡했습니다. 봉기가 진압되고 다시 국군에게 여수와 순천이 수복된 뒤 좌익들은 백 배 천 배의 복수를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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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출신 장교 김종원이 일본도로 좌익 혐의자들의 목을 치고 다닌 것은 얘깃거리도 안될 정도로 참담한 ‘복수’가 뒤따랐지요. 그렇게 좌익들이 무더기로 잡혀 떼죽음을 당할 무렵, 손양원 목사는 참으로 기괴한 말을 꺼냅니다. 아들들을 죽인 안재선을 용서하고, 그 석방을 탄원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양아들로 삼겠다는 것이었지요. 손 목사의 딸 손동희가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라는 책 중 한 대목을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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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학생이 안 잡혔다면 또 모르되 일단 잡힌 이상 모른 채 할 수가 없구나. 내가 무엇 때문에 (신사참배 거부로) 5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견뎌 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제1, 2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등)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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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희야.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그가 죽는다고 오빠들이 살아 돌아오겠느냐?......지금 시대가 바뀌었으니 보복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골육상잔은 민족의 비극이고 국가의 참사인데 이 민족이 이래 죽고 저래 죽으면 누가 남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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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 예수가 남긴 최고의 가르침이자 최악의 명령. 신의 아들쯤 되는 당신예수라면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 당연히 손 목사의 딸도 반항했습니다. 오히려 그쪽이 인간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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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겁니까? 다른 목사님들은 그렇지 않는데 아버지는 왜 항시 별난 예수를 믿습니까? 하늘 아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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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손양원 목사는 끝내 안재선을 구해 내어 수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여순 사건의 상처는 깊어서 정신 나간(?) 아버지 대신 그 원수를 갚으려는 사람도 있었기에 손 목사는 항시 안재선 곁에 머무르며 그를 지켰습니다. 안재선이 세례를 받을 때 손 목사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는 수양아들의 성장조차 보지 못할 운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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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터지고 전라도 지역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인민군에게 떨어지지만 손양원 목사는 피난을 포기합니다. 나환자들을 두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인공 치하를 살다가 9월 28일 인민군에게 피살당합니다. 장례식 때 상주를 맡은 이는 수양아들 안재선이었지요.

이후 안재선은 평범하고 가난한 월급쟁이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손 목사의 결의에 눌려 침묵하기는 했으나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던 손 목사의 딸 동희를 찾아옵니다. 안재선은 흐느끼며 말했죠. “동희야 나 지금 돌아가면 곧 하늘나라로 간다. 내 네 오빠들을 만나면 엎드려 사죄하마.” 암이었습니다. 그 고백을 하고 보름 후 안재선 역시 세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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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에서 성자처럼 모셔지는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입니다.저는 그의 굳센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행적을 통해 6.25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기독교가 잃어버렸던 예수의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라.”는 울림의 여운을 맛보며 지그시 눈 감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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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만이라도 그 계명에 조금이라도 더 충실했다면 동족상잔의 비극은 훨씬 더 줄어들었을 것이고 6.25 전쟁 최대의 민간인 학살인 황해도 신천 대학살 (기독교인들과 좌익들의 대결에서 말미암았던)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오늘날 빨갱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사이비 목사들의 존재도 미약했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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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1948년 10월 19일 터져 나왔던 여순 사건에 섣불리 가치 판단이 들어간 이름 (‘항쟁’같은)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우려가 듭니다.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운 좌익들은 또 다른 ‘동포’들에게 매우 잔인했고, 결국은 더욱 지독한 국가 폭력을 폭발시켰고 여수와 순천의 양민들까지도 그 복수의 희생양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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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사건 당시 국가가 자행했던 민간인 학살의 진실은 언제든 밝혀져야 하고, 그 범죄를 고백하고 수습하고 사죄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해방 후 좌우익의 갈등이 끝내 전면전을 불렀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또 갈라 싸우고 죽고 죽였던 이들의 증오심이 채 녹지 않은 상황에서 ‘항쟁’이라는 새된 표현이 과연 무엇에 유익할지는 고민이 필요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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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선이 ‘항쟁’에 가담해 싸운 이라면,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 논란과 시비는 또 다른 분쟁의 불씨가 되고 갈라치기의 담장이 되지 않을까요. 여순 사건의 재조명에 필요한 것은 누가 옳았고 글렀고의 시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행한 과오를 인정하고, 결코 그 악몽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결의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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