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그림 속 역사 -마드리드 봉기

명화 속에 남은 유럽의 역사 -마드리드 봉기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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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왕가들의 혼맥을 보다 보면 말이지 절로 그 말이 나온다. “완전히 개족보구만.” 그야말로 상상 가능한 근친혼은 다 등장해. 물론 개족보라는 말 함부로 쓸 게 아닌 건 알아. 우리 나라만 해도 고려 시대때는 왕이 이모들과 결혼하기도 했으니까. 더 거슬러 신라 시대로 가면 더 심하고 말이야. 어쨌든 유럽의 왕가의 경우 참 애달픈 일은 근친혼 때문에 그야말로 안습인 유전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았고 바보에 가까운 왕들이 속출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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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유럽 왕가 합스부르크의 위풍당당한 왕들은 대개 어김없는 주걱턱이었는데 이게 바로 근친혼의 결과였어. 주걱턱끼리 결혼하면 주걱턱이 나오는 게 당연한 이치. 콩 심은 데 팥 나겠어. 처음엔 그냥 특징 정도에 그쳤지만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2세 (재위 :1665~1700) 쯤 되면 자기 스스로 입을 못 다물 정도의 주걱턱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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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고야의 그림 아님

카를로스 2세는 후사를 낳지 못하고 죽지.(낳을 능력이나 됐겠어.) 그 뒤 공석이 된 왕위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손자가 차지하지. 루이 14세의 부인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오스트리아 왕비 마리 테레즈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어. 물론 순탄하게 왕위에 오른 건 아니야. 잉글랜드, (합스부르j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등이 동시에 “누구 맘대로?”를 외쳤기 때문이고 세계사 시간에 배운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 벌어지게 돼. 한 40만 명쯤 죽었다고 하지. 이 전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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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페 5세가 왕위를 계승하되 스페인과 프랑스 두 왕국의 합병은 불가한 것으로 대충 정리됐는데 필리페 5세의 아들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 역사에 드문 영명한 군주로서 퇴락한 스페인의 재기를 위해 힘쓴 계몽 군주였지만 이 사람도 스페인 왕가에 전승돼 온 근친혼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그 불운한 결과는 아들 카를로스 4세에서 나타난다. 카를로스 4세는 한 덩치하는 힘 좋은 사내였지만 머리가 좀 모자랐어. 자신의 4촌남매와 결혼하게 되는데 결혼을 앞두고 뭘 어떻게 하지? 당황했다고 해. 성질 끝까지 난 아버지 카를로스 3세는 이렇게 호통을 치게 되지. “이 바보야 여자 따위는 다 같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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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묘한 건 이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왕과 그 사촌이자 왕비 루이자 사이에서는 무려 14명의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거지. 유산은 열 번. 상시적 임신 태세였다고 보이는데 부부 금슬이 좋아서? 글쎄올시다. 그렇게 아름답게 생각하기엔 왕이 일생 동안 신뢰했고 죽을 때까지 끼고 있었던 고도이라는 이를 비롯, 왕비와 염문을 뿌린 남자가 너무 많았어.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카를로스 4세의 가족화를 보면 고야의 심술궂은 리얼리즘이 잘 드러나 있어. 카를로스 4세의 좀 맹한 인상과 왕비의 억센 인상을 보면 고야가 그리면서 어지간히 낄낄거리지 않았을까 싶지. 이 그림의 맨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페르난도 왕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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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했던 부왕의 총신이자 (왕비의 애인?) 고도이는 나름대로의 외교 정책을 펼쳐 보지만 프랑스에게 이용만 당하지. 이를테면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에게 괴멸당한 건 프랑스 해군만이 아니야. 얼마 안 남고 퇴락했을망정 그래도 왕년의 해양 대국 스페인의 해군도 끼어 있었지. 또 프랑스와 손잡고 포르투갈을 공격했다가 프랑스의 스페인 침입을 앉아서 묵인한 꼴이 됐고. 여기에 격노한 민중 반란으로 부왕은 퇴위를 선언하고 왕위를 페르난도에게 물려 주는데 유럽의 지배자로 떠오른 나폴레옹은 이미 그럴 뜻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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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페르난도를 소환하고 나폴레옹 면전에서 스페인 왕가는 드잡이를 벌여. 아버지는 아들에게 왕관 도둑놈이라고 욕하고 아들은 싸가지가 없이 대답하고 어머니는 자기의 총신(애인?)을 감싸는 가운데 아들을 공박하지. 나폴레옹의 머리 속에서는 이 떨거지들을 치워 버리고 자신의 혈육으로 하여금 스페인을 지배시키겠다는 생각이 서게 돼. “자 페르난도. 이제 왕관을 내 형 조제프에게 바쳐 주겠나. 그가 호세 1세로서 스페인을 다스릴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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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가는 프랑스의 한 도시에 연금됐어. 그리고 나폴리 왕이자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가 스페인의 왕으로 선포된다. 1808년 5월 2일 일단의 프랑스 군대가 카를로스 4세의 자식들을 프랑스로 옮겨 가려고 시도했을 때 문제가 발생해. 마드리드 시 의회는 여기에 반대했지만 카를로스 왕의 서신이 들이밀어지자 마지못해 허락하지. 그러나 마드리드 시민들은 허락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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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이 왕, 식신에 가까운 식탐으로 유명한 왕세자, 정부가 몇 명인지도 모르겠는 왕비. 미워 죽겠던 왕가였지만 나폴레옹이라는 외세의 절대 권력자의 마수 앞에서 어린 공주와 왕자는 자신들의 목숨으로 지켜야 할 대상이 된 거야. 이런 예는 우리 역사에도 있지 아마. 고종 황제의 인산을 기하여 일어난 3.1운동이라든가 역사상 최소의 존재감 순종의 장례식에 일어난 6.10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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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국민들은 마침내 결사적인 봉기를 일으킨다. 상대는 유럽을 제패하고 동방의 러시아마저 무릎 꿇린 황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사령관은 나폴레옹의 매제 뮈라 장군. 머리는 좀 모자라지만 용기 하나는 충만했던 기병대 사령관. 반면 봉기의 주축은 그야말로 하층민들이었어. 귀족들은 양순했고 스페인 군대도 일단 숨을 죽였다. 딱 하나 봉기에 가담했다가 프랑스군에 순식간에 진압당한 몽텔리온 포병대를 제외하면. 하지만 시민들은 무기도 없이 세계 최강 군대에 달려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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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프랑스 군에는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갔다가 데리고 온 맘루크 기병대(즉 무슬림들)도 편성돼 있었는데 이들이 시민들을 향해 반월도를 휘두르며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고야가 그린 게 <5월 2일 맘루크 기병대의 돌격>이야. 이건 스페인 사람들에게 충격이 컸을 거야. 무려 800년 동안을 이슬람의 지배 하에 허덕였던 스페인 사람들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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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은 동물의 세계 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한 흐름이다 도덕경 읊고 서로 사랑하라 외치는 소리가 의미 있을 때보다는 소 귀에 상대성 원리처럼 치부될 때가 월등하게 많았지. 하지만 문제는 그 강함을 무너뜨리는 건 또 대개 약함의 분노와 약함의 슬픔, 그리고 그 분노와 슬픔의 조합이지. 그런데 그 분노와 슬픔을 가져오는 건 다름아닌 강자의 오만과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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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저 진상들을 스페인 왕위에 앉히느니 내 형이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한때 지구상에서 영국보다 먼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했던 스페인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군대 하나 없이 덤빌 테면 덤벼. 다 죽여 버리갔어.”라고 ‘사회 혼란’을 가져온 ‘불순분자’들을 ‘엄벌에 처한’ 순간 프랑스 제국 군대는 ‘게릴라전’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는 거야.

“잘못된 길에 들어서 반란을 일으키고 살해자가 된 마드리드 시민들이여 그대들로 인해 프랑스군의 피가 흘렀다. 이것은 복수를 부르게 되었다. 모든 무기를 들고 봉기에 참여하다 체포된 이들은 모두 사형에 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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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 뮈라 사령관의 포고다. 이 포고 때문에 한 열 다섯 살난 소녀가 생명을 잃어. 마누엘라 말라사나. 그녀는 재봉사였고 가위를 들고 가다가 그를 무기로 받아들인 프랑스군에 의해 죽음을 당해. 지난 2008년 스페인 정부는 독립전쟁 200주년 기념 유로 금화를 발행하는데 그 중 하나는 이 마누엘라와 앞서 말한 몽텔리온 포병대 장교들의 장렬한 최후를 담고 있지.

5월 2일과 5월 3일 프랑스군은 학살을 계속했어. 고야의 붓은 이날 역시 화폭에 담았다. <5월 3일>은 좀더 유명한 그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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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질린 사람의 눈동자, 분노의 저주를 퍼붓는 사람의 주먹,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사람의 손모음, 그리고 얼굴을 드러나지 않은 채 총을 겨눈 프랑스 군인들. 그 가운데 돋보이는 것은 역시 중앙에 배치된 흰옷 입은 남자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팔을 벌린 채 고개를 똑바로 들고 압제자를 노려보지만 그렇다고 턱없이 비장한 것도 아닌, 오히려 어이없다는 표현이 적절할 표정을 지닌 이 흰옷의 사내는 유럽 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의 ‘종양’으로 불리운 스페인인들의 저항의 상징으로 영원히 남게 돼.

고야 자신의 행동은 그렇게 용맹하지는 않았어. 쫓겨난 스페인 왕가의 궁정 화가였던 그는 여전히 그 실력을 인정받아 스페인을 점령한 프랑스 장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어둡고 치열했던 저항의 시절을 보냈지. 하기사 눈은 형형했으되 귀는 멀어버린지 오래였던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지는 않았을 테지만.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고야가 <5월 2일>과 <5월 3일>을 그린 것은 1814년 프랑스군이 쫓겨나고 페르난도 왕이 복위한 뒤였어. 그는 의회에 이 그림들을 그리겠노라 청원하고 왕실의 경제적 후원까지 얻어서 이 그림을 그렸지. 하지만 이 그림은 오랫 동안 공공적인 장소에 내걸리지 못했고 미술관 지하에 60년 동안이나 처박혀 있었어. 민중의 봉기에 힘입어 돌아올 수 있었던 왕가 또한 민중이 영웅으로 그려진 이 그림에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 못한 때문이었을까.

이 그림은 훗날 한국 땅에서 "피카소 그림을 전시하면 빨갱이"라는 저질 신화를 낳았던 피카소의 명작 "한국에서의 학살"의 모티브가 된다. 구도 또한 비슷하다. 희생자는 왼쪽, 학살자는 오른쪽. 고통스러운 희생자와 무덤덤한 가해자. 그리고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살인자들까지. 피카소는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에 영감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신천 사건은 미군의 일방적인 학살이라기보다 좌우익의 충돌 와중에 일어난 동족상잔의 비극인 편에 가깝다는 점에서 <5월 3일>과는 다르겠지만 우세한 폭력을 무기로 한 집단과 그 앞에 선 무력한 피해자의 비극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할 거야.

그리고 그 모티브는 다양한 형태로, 하지만 비슷한 구도로 제기되고 있다. 어찌 보면 역사라는 건 그렇게 인류라는 땅을 휘감아 도는 강물 같은 게 아닐까. 흘러간 듯 보이나 불현듯 다시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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