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가 약자되는 사회] 트럼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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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Things First

안녕하세요. @rothbardianism 입니다. 오랜만에 좀 무거운 글로 여러분들께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이오스 텔레그램에서 이야기 하다가 그 텔레그램 방장님이 제 글 구독자이신데, 최근에 글을 잘 안올리신다는 피드백을 받고, 부랴부랴 멘탈을 부여잡았습니다. 지금 비트코인은 열심히 뚝빼기 깨지는 중이군요. 요즘엔 비트코인이 가치 저장의 기능 말고도, 뚝빼기 터지는 기능이 추가적으로 소프트 포크 되었나 의심이 될 정도로 뚝배기만 터지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왕 내려가는거 화끈하게 내려가주었음 합니다. 스팀이야 파워업하면 그냥 강제 존버되는거고, 이오스도 락업되면 강제 존버라서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 언젠간 오를테니 말이죠. 그나저나 블록원 측에서 중요한 발표를 하나 한다고 했는데, 그게 기다려지는군요. 어차피 투자는 기다림의 미학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보기로 합니다.

강자를 끌어내린다고 약자가 강자가 될 순 없다.

그럴듯한 말입니다만, 제가 지어낸 말은 아닙니다. 미국의 29대 부통령이자, 30대 대통령이 되는 켈빈 쿨리지(Calvin Coolidge)의 말입니다. 켈빈 쿨리지의 말은 오늘날 사회에도 적용해볼 수 있는 문구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흔히 약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강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깎아내리며 자신들의 위치를 노리곤 합니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그랬습니다. 사실상 강자(strong)와 약자(weak)의 프레임도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이런식의 프레이밍을 해놓고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등이라는, 어찌보면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결국 자기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과 여, 백인과 흑인,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 이런 것들도 결국 프레이밍 입니다. 사람들을 집단에 분류해서 일반화하고, 몰아가고, 손가락질 하는 문화. 한국에서 시작한 거 같지만, 미국이 늘 먼저 시작해왔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기준에서 강자들을 깎아내리고 끌어내린다고, 자신들이 강자들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갈 순 없습니다. 물론,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을 순 있지만, 장기적으론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면에서 켈빈 쿨리지 대통령의 말을 다시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트럼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트럼프가 당선된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사회적인 요인에는 마녀사냥 당한 강자들의 분노도 어느정도 기여를 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강자라는 것도 자신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레이블링 된 것이었죠.

약자가 강자되는 사회, 오바마 시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Yes We Can이란 문구를 달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날은 아직도 미국사에서 역사적인 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선언을 하고도 백 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꿈이 있다고 선포하고도 수십 년이 지나서 흑인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는 날이었죠.

대통령이 되는데엔 인종, 성별, 재산등의 걸림돌이 없어야 하겠지만, 오바마 시대는 역차별이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페미니즘과 흑인 인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죠. 여성 인권 신장, 흑인 인권 신장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좋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여성 인권은 신장되어야 하고, 흑인 인권도 보호받아야 하지만, 자신들의 주장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풍토가 생기게 됩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같이 기본 경제학적 원리조차 무시하는 이야기를 반대하면, 혐오론자 차별론자로 몰아가고. 흑인이 사실 백인보다 더 많은 범죄를 일으킨다라는 FBI통계를 들이밀면 인종차별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로 몰아갔죠. 물론 통계는 변수들(Variables)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바뀌겠지만, 자신들이 내놓은 통계에 대한 다른 통계를 내면 몰아가니 문제가 되었죠.

다르게 생각해도 입을 다물게 하는 풍토가 생겼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명분하에 말이죠.

그렇게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혹시나 반대하면 사회적 기류를 이용해서 몰아가고 손가락질 하기에 이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강자들을 깎아내리고 폄하하여, 자신들이 강해지려는 심보였습니다.

그리고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반대하고 싶어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고. 사회의 전반적인 기류는 자신들을 따라가는듯 했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였습니다

그런 사회적 기류에 반대하고, 마녀사냥 당할 것을 감수하고 발언을 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매장당할 두려움보다, 매장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더 강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죠.

페미니즘은 암이라는 슬로건을 달고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동성애자 마일로의 모습입니다.

흑인들이 나서서 흑인 인권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합니다. 흑인의 인권이 남들의 인권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흑인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이슈들을 종합해서 대변하는 정치인이 나옵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였죠.

물론, 평등을 지향하고 인권을 위한다며 운동하던 이들은, 마일로와 같은 사람들이 대학가에서 강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폭력적인 시위를 하는 건 물론이고, 실제로 폭력을 하기도 합니다.

백인의 삶도 중요하다는 주장을 했던 리차드 스펜서가 흑인에게 얻어맞는 모습입니다. 백인을 때려서 흑인의 인권을 신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정말 잘못된 것이죠.

결국 이러한 분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 트럼프의 대통령직 입니다. 당시에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 만으로도 미친놈으로 손가락질 받던 시기라 조용히 투표만 하고, 아무말도 안한다고 해서 샤이 트럼프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죠.

과연 저기에선 누가 약자일까요?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이 강자일까요? 아니면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몰아가고, 매장시키고, 나쁜놈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약자일까요?

이렇게 얘기하면 저 또한 한국 사회에서 매장당할 수 있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니, 젠더 감수성이 없고, 기득권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흉자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죠. 그러면서 페미니즘 관련된 책 읽어보라며 제목을 던져 줄지도 모릅니다. 페미니스트에게 정치이론을 배운 저에게 말이죠.

하지만 자기와 반대되는 사람을 매장하는 것이 결코 평등주의는 아닐겁니다.

폭력과 강제를 반대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주장하는 것을 일관적이다라고 말할 수 없겠죠.

나와 다른 타인을 틀린 사람으로 몰아가며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한것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사회적인 인식만 더 부정적이게 되어버렸죠. 미국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겁니다. 한국도 이제 시작하겠죠.

절대로 자신의 기준에서 강한 사람을 깎아내려서 자신이 강해질 수는 없습니다. 타인을 깎아내리기 이전에 타인의 입장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내가 정의라고 떠드는 그 무엇이 타인에겐 정의가 아닐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가치는 상대적이니까 말이죠.

인권신장,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서 타인의 권리는 깎아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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