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페로몬02] 우린 모두 지구인, 우주에서 왔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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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코레아요? 남쪽 코레아요?
“북쪽도 아니고, 남쪽도 아닙니다. 단지 코레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해 친구의 집으로 가는 택시 안이었어. 중남미에서 만난 사람들은 매번 같은 질문을 했어. ‘코레아’라고 밝히면 늘 노르테(북)인지, 수르(남)인지 되물었지. 그럴 때면 난 “노 노르테, 노 수르. 솔로 코레아!”라고 응수했어. 어떤 이는 눈을 크게 뜨고 “별스런 녀석 다 보겠군” 하는 표정을 지었고, 어떤 이는 갸웃거리다가 되묻기도 했어. “남북한이 하나였다는 건 나도 알아. 지금은 둘이잖아. 넌 어느 쪽이냐고!” 상대가 이렇게까지 따지고 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

다행히 택시기사는 나의 대답에 “그거 참 멋들어진 표현이군!” 하고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쪽이었어. 그는 내가 중남미 어느 나라에 가봤는지 물어본 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심해야 할 점도 알려주었지. “택시 안에서 스마트폰을 볼 때는 창문을 닫아. 창으로 손을 집어넣고 스마트폰을 훔쳐 달아나는 오토바이족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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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는 청담동 같은 거리의 맨션에서 살고 있었어. 고층맨션이 밀집한 곳으로 동네는 말끔했지. 일주일을 묵은 후 아르헨티나인이 운영하는 민박으로 옮겼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냐. 서울도 그렇지만 대도시란 지역마다 분위기가 달라. 가령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은 경복궁, 북촌, 남산 등 명소를 찾아다니며 서울을 경험하지만, 자신이 묵는 동네 분위기로 서울을 더 많이 알게 되지. 그래서 인사동, 이태원, 강남역 어디서 묵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서울을 경험하게 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인구는 약 1300만명. 한곳에서 묵다간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 될 것 같았어.

처음 옮긴 지역은 서울로 치면 신림동쯤 되는 동네. ‘시실리’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점심 무렵이면 택시기사가 모여들었어. 싼값에 이탈리아 요리를 배부르게 먹었지. 큼직한 쇠고기 스테이크를 빵에 끼운 로미토가 겨우 1500원 할 정도였으니까. 일주일을 묵은 후 산텔모의 게스트하우스로 옮겼어. 인사동 뒷골목 같은 분위기, 주말엔 남미에서 가장 규모가 큰 벼룩시장이 섰어. 왕자웨이(왕가위)가 감독한 <해피투게더>에서 량차오웨이(양조위)가 일하던 ‘바 수르’도 이곳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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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북미, 유럽, 한국인 관광객이 선호하는 팔레르모. 부티크 상점이 늘어선 동네. 내 취향은 아니었어. 그렇지만 이 또한 대도시의 한 모습이니 지내보기로 했지. 세련된 동네인 만큼 물가가 제법 비쌌어. 그나마 저렴한 숙소를 찾아냈지. 체크인을 하고, 도미토리 침대 하나를 배정받고, 샤워도 했으니 호스텔 구경이나 해볼까? 마당으로 나가니 기타를 든 여행자가 테이블 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어. “올라!” 인사를 하고 맞은편에 앉았지. “넌 어디서 왔니?” 그가 물었어. “한국.” 내가 대답했지.

“북한이니, 남한이니?” “북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그냥 한국.” 그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어. 이제 내가 물어볼 차례. “넌 어디서 왔는데?” “바스크.” “바스크??” “응!” “아, 바스크!!!”

내게 처음 스페인어를 가르쳐 준 델핀의 고향이 바스크라고 했어. “바스크는 스페인과 프랑스에 걸쳐 있는 땅이야. 그래서 스페인령과 프랑스령으로 나뉘어.” 그녀 덕분에 피레네산맥 인근에 있다는 바스크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알게 되었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독자적 언어에 게르만, 라틴족과 전혀 다른 문화를 유지해 왔다고. 16세기 나바라 왕국이 무너지면서 대부분의 땅이 스페인으로 흡수돼 자치구로 남았는데, 20세기에 프랑코 정권이 들어서면서 가혹한 탄압을 받았대. 결국 무장투쟁단체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가 등장했고 지금도 분리,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지.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 체 게바라도 바스크계 이민자의 자손이라던가.

‘바스크에서 왔다’는 대답에 난 그가 무슨 말을 하고픈지 알 수 있었어. ‘솔로 코레아!’라는 내 대답을 듣고 그가 무슨 의미인지 금방 알아챈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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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냐드와 나는 순식간에 친해졌어. 맥주를 나눠 마시고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를 듣는 사이 해가 저물었어. 곧 호스텔 마당은 도시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여행자들로 가득 찼지. 영국, 프랑스, 칠레, 네덜란드, 국적도 다양했어. 모국어가 제각각 다르니 영어가 공통어로 자리 잡았지. 코크니(런던 토박이) 억양의 영어를 하는 프랑스 친구 목소리가 가장 컸어. 큰 키에 긴 팔을 휘저으며 떠드는 모습은 희극배우 같았지. 누군가와 한참 얘길 나누던 그가 유일한 동양인을 발견하곤 물었어.

“넌 어디서 왔니?”
“한국.”
“북한, 남한?”
“북쪽도 아니고, 남쪽도 아니고, 그냥 한국.”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그가 되물었어. “남북한이 원래 하나였다는 건 나도 알아. 내 질문의 요지는 둘 중 어디서 왔냐는 거야!” 달을 가리키면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이 굽었다고 하는 치들이 어디에나 있지.

“넌 어디서 왔니?”
“프랑스.”
나 역시 되물었어. “북프랑스? 남프랑스?”
“북프랑스도 아니고, 남프랑스도 아냐! 우린 그냥 프랑…”

목청을 높이던 녀석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어. 내가 가리킨 달이 어디쯤인지 눈치챈 모양이군. 더 이상 대답하기가 궁색한지 그는 하던 말을 끝맺지도 않은 채 버냐드에게 고개를 돌렸어.

“넌 어디서 왔는데?”
“바스크.”
“프랑스령? 스페인령?”
“프랑스도 아니고, 스페인도 아니고, 그냥 바스크.”
“이봐, 세상에 바스크란 나라는 없어. 프랑스도 아니고 스페인도 아니라면, 바스크는 아예 없는 거야.”

그의 공격적인 말투에 버냐드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입을 닫은 채 낯을 붉혔어.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지. 사람들은 대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하며 숨죽인 채 버냐드의 입을 바라봤어. 말을 꺼낸 건 나였어.

“누구 티베트에 가본 사람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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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를 돌리자 긴장이 풀렸어. 여행자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티베트에 대한 제 경험과 견해를 피력하기 시작했지. “네팔 여행 중 티베트에서 온 할아버지를 만났어. 중국 침공 때 히말라야를 맨발로 넘었대.” “중국 군인이 티베트인을 몇이나 죽였는지 아니? 무려 수백만이야.” “난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해!” “나도!” 티베트 얘기로 후끈 달아올랐을 무렵 내가 질문을 던졌어.

“만약 티베트인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테이블을 둘러싼 이들이 이구동성 소리쳤어. 이번에도 프랑스 친구의 목소리가 제일 컸지. “당연히 티베트지! 티베트는 중국이 아냐. 티베트는 티베트야!” 프랑스 친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봤어. 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되물었어.

“티베트에 대해선 그렇게 여기면서, 바스크는 왜 프랑스나 스페인이어야 한다고 말하지?”

녀석은 망치로 뒤통수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어. 사람들은 내가 왜 느닷없이 머나먼 티베트 얘기를 꺼냈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어. 짧지만 긴 침묵이 흐르고. 나는 말을 이었지.

“실은 나 북한 사람도, 남한 사람도, 한국인도 아냐. 그리고 넌 프랑스인이 아니고, 얘는 바스크인이 아냐. 우린 단지 지구인이고, 모두 우주에서 왔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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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져 있던 버냐드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어.

누군가 “맞아!” 하고 외치며 손뼉을 쳤어. 손뼉이 하나둘 퍼지더니 마당의 모든 이들이 박수를 쳤지.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는 ‘좋은 공기’라는 뜻. 백년 전 ‘남미의 파리’로 칭송받던 도시는 자동차 매연으로 매캐했지만, 마당의 공기만큼은 한껏 맑아진 듯했어. 프랑스인도, 바스크인도, 영국인도, 네덜란드인도 잔을 채웠어. 그리고 다 같이 술잔을 부딪쳤지.

"그래, 우린 모두 우주에서 왔어!"

일찍이 유목민적 삶을 동경했던 헤르만 헤세는 <방랑>이란 수상집에서 말했지.

'경계'처럼 증오할 것도 '경계'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다고. '경계'를 무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전쟁도 봉쇄도 없어지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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