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diary] 일 년의 반


일 년의 반이 지나갔고 비와 함께 새로운 일 년의 반이 시작되었다. 최근 나는 무척 지쳤었는데 무엇을 하고 할 수 없는가에 대한 문제와 함께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 제일 싫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벌써 저만큼 앞서서 달려나가고 있는데, 여기서 멈추어 있는 듯한 느낌에 약간의 자괴감 같은 것이 들기도 했다. 내가 걷고 있는 길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방향이라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그럼에도 이루어 놓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에 비해 크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나 또한 욕심이 있는 사람이고 부단히 앞으로 치고 나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앞서 나가는 것은 최소한 현상 유지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현상 유지가 단순히 멈추어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 유지에도 노력이 든다. 가만히 있다고 물에 떠 있을수는 없는 것처럼 (완전히 죽어버리지 않는 한 말이다.) 발버둥을 치든 헤엄을 치든 물살을 가르고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 오롯이 그 상태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젖먹던 힘까지 내야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과 지금 유지되고 있는 성취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 가만히 있게 되면 결국에는 사그라질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관계에 있어서든, 성취에 있어서든 지금의 "적절함"이 미래에도 "적절함"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며, 미래의 적절함을 취하기 위해서는 결국 지금도 움직여야한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지치고 놓아버리고 싶은 날에도, 피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배하는 날에도 다가와야할 미래의 무게에 눌리는 느낌도 든다. 다가올 수 있는 미래와 다가와야할 미래는 다른 법이어서, 가능성의 미래가 당위의 미래로 치환되는 순간 숨이 막히고 무겁다. 나는 무수한 가능성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하여 갯수가 많음이 방향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에, 방향의 시선을 견지하는 만큼 결국 스스로 틀을 짜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가지 이슈들을 접하면서, 스팀잇에서 글을 쓰고 활동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곰곰히 되돌아보게 된다. 스팀잇도 일종의 SNS이기 때문에, 이 플랫폼 위에서 건설되는 사회적 관계가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언제 한번 이야기했듯 관계는 숫자로 치환되며 현실 세계의 라벨링이 작동할 것이기에, 나로서는 오히려 이런 요소들이 부담으로 작동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글들은 대화 이상의 것을 넘어서지 않으며 온라인의 관계들이 오프라인을 잠식하지 않도록 적절한 거리와 분리를 유념해두었던 것 같다. 하지만 SNS는 말 그대로 사회적 관계를 추구하는 플랫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프라인의 관계들이 온라인을 통해 더 끈끈해질 수 있다면, 혹은 온라인의 화두가 오프라인의 이야기를 보완할 수 있다면, 이렇게 관계를 다채널로 맺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다만 내 성향 상, 오프라인의 관계가 바탕이 되는 (부차적인) 온라인 소통을 선호하기 때문에, (온라인 관계가 오프라인 관계를 휘저어놓거나 잠식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철칙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온라인 관계만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주고받음이 가능할 것이냐에 대한 물음 (여기에서도 앞의 철칙은 유효하다) 에 대해서는 사실 실험을 하고 있는 측면이 크다. 아직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까.

나는 남의 불행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고 어렵기에, 어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또한 꺼려한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나의 불행을 다루기도 너무나 어려우며, 나와 타인을 관통하는 불행의 범주가 과연 같은 것으로 묶일 수 있는지 조차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각자의 불행은 각기 결이 다르고 주어진 삶의 과업에 대한 깊이와 폭도 다르기에, 어떠한 사태를 바라보며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방어적이고 수비적인 것에 불과하다. 불행의 원인이나 요인을 언급하는 것은, 사실 나로서는 내가 가진 깜냥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단지, 절망과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 그 절망과 고통의 공간을 헤아려보는 것, 완벽하진 않더라도 나의 삶의 경험과 궤적에 비추어 짐작하고 닿아보려 노력해보는 것, 각자 삶과 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해의 한계를 넘을 수 있다고 어줍잖게 단언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 정도에 불과할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것들을 일일히 표현하지 않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닿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쉽게 적기 어려운 문장들이 있다.

불행을 마주하게된 누군가(들)에게 위로를 담아.


일 년의 반이 지나갔다. 그리고 앞으로 일 년의 반이 남았다. 사람이 일 년만 사는 것은 아니더라도, 인간 스스로 주기를 정해놓았다. 시작과 중간평가와 마무리가 항상 반복된다. 몇 회가 반복될 수 있을지는 각자의 운에 달렸겠지만 말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운에 있어서는 행운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언제나 생애의 반에 도달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만약 생애의 반에 도달했거나 지나쳐갔다는 생각이 든다면, 제논의 역설 처럼 삶의 여백에 대한 무수한 생애의 반이 눈 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상하기로 한다. 새로운 생애의 반에 따라, 지금까지의 궤적과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믿음의 걸음이, 믿음의 궤적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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