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부처 앞에 등장한 차(茶)

부지당의 차 이야기 19.

차인(茶人)들에게 차(茶)란 글자가 '솟대'를 상징하고 있다고 말하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동백나무과의 한 종류인 차나무 잎만이 차이고, 다른 것은 대용차 정도에 불과하다고 신앙처럼 믿고있는 이들에게 나는 분명 이상한 사람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차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는 중국인들 조차차의 기원을 고대 신농(神農)에서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만난 나무에 하필이면 차(茶)란 이름을 붙였까를 따져본다면 나의 주장에 귀를 기우려 볼 것입니다.

신농(神農)이란 인물은 고서에 동이족의 제사장 단군(檀君)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그가 말한 차나무란 이름은 하늘과 만날 수 있는 신단수(神檀樹) 정도로 삼을 만큼 신기한 나무로 보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나의 썰에 혹자는 차(茶)란 중국 글자를 가지고, 제논에 물대기 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런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자가 정말 중국 글자일까요? 한자는 동 아시아 지역에서 장구한 세월동안 만들어지거나 소멸되기도 했던 문자였습니다.
이 글자들의 주인공들 또한 거석(巨石)문화의 후손들이었고, 그들이 그린 암각화(岩刻畵)에 한자의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한자가 중국의 갑골문자에서 비롯되었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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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로 적힌 우리 고대 경전)

더구나 갑골문자를 만든 상(商)나라 역시 화족(華族)이 아니라 동이(東夷)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상형문자(象形文字), 회의(會意)문자, 표음문자(表音文字), 지시(指示)문자 등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한자(漢字)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茶)라는 글자는 언제쯤 출현되었을까요? 나는 문자의 흐름상 고조선의 붕괴하면서 만들어진 글자였다고 봅니다. 사실 고조선은 동아시아에서 매우 특별했던 나라였습니다.
비록 신정(神政)으로 나라를 통치했지만 동시대어는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광대한 지역에서 2300여년 간이나 존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이같은 나라가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미스태리임에 분명하지만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매우 선진적인 신권통치 국가였기 때문이라 봅니다. 하늘의 아들에게 신권을 부여받아 나라를 세웠고, 그 천신(天神)의 혈통인 단군이 하늘의 명에 따라 나라를 유지시킨다는 론리는 공동체를 유지시키기는 매우 치밀한 명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조선이 어느 민족보다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를 일찍 마감하고 청동기 문명을 꽃피울 수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청동기문화는 수렵이나 채집(採集)으로 살아왔던 떠돌이 삶을 마감하고 집단거주의 농경 사회로 진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규칙이 만들어지고, 이를 통제할 권력이 생겨 부족 국가 형태를 조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같은 고조선 사회에 사변(事變)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철기(鐵器)문명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만든 사회적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생산(生産)성이 폭팔적으로 증가되었고, 대량의 잉여 생산물이 만들어 졌습니다.

문제는 이 때문에 평화롭던 고조선의 정치지형에 지각변동이 촉발되는 대혼란을 시작되었습니다. 지역 맹주들은 쌓여진 부로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그 힘으로 고조선의 통치 질서에 반기(叛起)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혼란의 전국(戰國)시대가 막을 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여, 옥저, 읍루, 숙신, 삼한 등의 부족국가들이 나타났고,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통합 분할되는 이른바 사국시대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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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의 질주에 제동을 건 것은 내부 백성들이었습니다. 힘으로 강제할 수 없는 백성들의 신앙(信仰)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왕들은 신당(神堂)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제사장, 즉 단군의 간섭을 받으며 통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속성상 이같은 상태를 그대로 둘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난감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불교(佛敎)라는 종교가 등장합니다.

여러분 중에 국사(國史)에 흥미를 가졌던 분은 ‘삼국시대 초기 불교가 도입되면서 왕권이 강화되었다’라는 내용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 아시는 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 내용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들이 기존고조선의 통치 질서였던 신권(神權)과 피터지는 격돌했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나타난 외래 종교가 새로운 변수로 작용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봅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맨 처음 불교를 도입한 나라는 김해 지역에 자리 잡았던 가야(加耶)였습니다. 신라중심의 역사관으로 보면 그 진실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가야는 한반도에서 가장 앞서 철기(鐵器)를 개발하여 수출로 부(富)를 축적했던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다음으로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 (372년)에 중국의 전진으로 부터 , 백제는 그보다 12년 뒤인 침류왕(384년)때 동진(東晉)으로부터 불교를 들여왔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

가장 뒤늦은 나라는 신라인데, 이는 지리적 폐쇄성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오랜 기간 신정(神政)을 유지시켰고, 이같은 보수성 때문인지 백제보다 200여년이나 늦게 불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듯이 불교는 신(神)을 모시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득도(得道)를 목표로 한 개인적 수행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군왕들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시키는 묘수를 부립니다. 한마디로 기막힌 꼼수를 벌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한번 살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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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은 먼저 거대한 불교를 사찰을 짓고 그곳이 신당(神堂)과 같은 곳이라고 뻥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건물 안에 불상을 가져다 놓고 여기에 대웅전(大雄殿)이란 간판을 붙였습니다. 이곳이 한웅(桓雄)할아버지를 모시는 곳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三神을 모시는 삼성각(三聖閣), 북두칠성의 영기를 받는 칠성단(七星壇)등 신당에 있어야 할 건물들도 사찰 안에 세웠습니다.

이처럼 절로 바뀌어진 신당과 승려들이 관리하는 껍데기 신당이 사찰에 들어서자 백성들은 절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결국 제사장을 없애는데 성공했고 비로소 통합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록에 나타나지 아니한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이같은 과정이 순조로웠을까요? 하지만 이같은 꼼수가 쉽게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차돈(異次頓)’사건같은 기록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기록은 법으로 금지된 포교활동을 어떤 중이 계속하자, 그를 잡아 목을 쳤는데, 힌 피가 하늘로 솟그쳤고, 그 때문에 왕이 불교를 받아드리게 되었다는 스토리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 왜곡의 개뻥이었다고 봅니다. 불교를 합법화 시킬 명분을 쌓기 위한 조작 사건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여론조작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보수적 신앙을 가졌던 신라인들에게 이정도는 되어야 불교도입에 반발을 무마했을 것입니다.

이같은 종교적 갈등과 충격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민족 문화의 편린(片鱗)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제부터 시작될 차례(茶禮)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넘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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