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1] 그리스도교는 범신론을 수용할 수 없는가?

서론

본래 인간은 야웨를 예배하며 야웨와 교제하며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고백에서도 찾을 수 있고, 야웨께서 먼저 다가오시되 온화하게 다가오시는 부분에서 찾을 수 있고, 그리스도의 예수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으며, 시편 기자의 찬미에서도 나오는 동시에, 요한묵시록에도 나오는 등 성경 전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 본질에는 의존성 혹은 종교성이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신, 자연, 군자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됐습니다. 그리스도교에 진리가 있다고 믿는 저는, 다양한 표현태가 그리스도교 신조와 본질에서 몇 부분만을 떼어 왜곡된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불완전한 신적 논의라는 견해를 지닙니다. 모든 표현태를 외면해서는 안 되고 일부 수용해야 한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범신론도 일부 수용할 수 있습니다.

연합과 성 삼위

개혁주의 구원론을 큰 틀로만 잡는다면 '예정 - 칭의 - 성화 - 영화'입니다. 영화는 성화가 완전하게 이뤄진 단계입니다. 내생에서 영생을 온전하게 누리는 상태입니다. 영생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서 17장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을 앎입니다. 내생에서 누릴 영생은, 앎의 확장이기도 합니다. 앎이란 무엇입니까, 인격을 지는 존재'를' 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관계를 맺어서 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 안에 하나'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성부 안에 성자, 성자 안에 성부. 우리가 성 삼위 하나님과 이상적인 관계를 맺어 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성 삼위 하나님 안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 안에 있을 때야 온전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 삼위 안에 들어간다? 당최 무슨 말이랍니까. 저는, 성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 맺으시는 관계에 참여함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타자를 알려는 마음에 "내가 저 사람 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고백하던 때가 있잖습니까. 야웨와 맺는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 삼위께서 맺으시는 관계에 온전히 참여함이 영화이기에 영화를 '온전한 연합' 혹은 '연합의 완전태'로, 성화를 '연합의 완전화'라고 칭하자고 제안합니다. ("온전한 '신화神化'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도 감히 생각해봅니다. 정교회의 교리는 제대로 알지 못하니 줄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로 표현된 말씀 안에서 성령 충만을 받아 성부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이 아닙니까.

단일성과 복수성

(수많은 인격이 통일성 안에 온전하게 거하게 되면, 곧 연합의 완전태를 이루게 되면, 각 인격이 지닌 독특성이 사라질까요? 개성이 없어질까요? 이 주장에 반대합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말마따나, 삼위일체 고백의 영광은 절대 단일성이 다수성을 용납하는 데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론의 특징은, 다수성 안의 통일성과 통일성 안의 다수성입니다. 각 인격은 더 독특해지는 동시에 더 통일됩니다. 각 개인이 지닌 특성은 유지됩니다.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절대 단수성과 다수성이 공존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결론: 만인과 범신론

구원론 상, 만인은 '신화神化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성'을 갖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 삼위 안에 온전히 관계 맺을 가능성을 말합니다. 신성은 없으나 '안에' 거함으로 관계를 갖습니다. 고로 "만물이 신이 될 가능성이 있음"으로 정의되곤 하는 '범신론' 가운데서 "만인이 신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그리스도교 신조가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범신론을 일부 수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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